▲ 강희룡서예가
▲ 강희룡서예가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부름으로써 그 대상을 파악하고 나 사이의 관계를 형성시킨다. 이름으로 그 사물의 본질을 남김없이 반영할 수는 없지만, 그 불완전함에도 이름이 없으면 우리는 그 사물을 일컬을 수도 없고, 무엇이라고 판단할 수도 없다. 히브리 신화에는 하나님이 빛을 창조 후 시간을 만들었으며, 천지를 창조하여 공간을 이루었고 그 공간에 삼라만상을 창조한 다음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데리고 와서 보여주는 사물에 대해 하나씩 부른 것이 이름이 되었다. 이렇게 이름을 주는 것은 고대부터 숭고하고 위대한 일로 인식하였다.

이름은 지명하는 힘이 있으므로 존경하거나 위대한 이는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이름이 불리면 대답을 해야 하므로 대답을 하는 행위는 이름 부른 자에게 지명을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전통사회에서도 조부나 아버지, 스승, 임금과같이 존경해야 할 대상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으며 심지어 자기 이름도 존경하는 사람 앞에서는 쉽게 부르지 않았다.

사람은 태어나서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회의 주체적 구성원으로서 승인하는 통과의례를 베푼다. 성인식이든 관례든 이런 의례를 거쳐야 비로소 한 성인으로서의 주체자로서 그 공동체와 사회의 책임감을 지닌 주인이 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관례를 치를 때 성인이 될 당사자에게 출생 시 이름 외에 친지나 후견인이 ‘장차 이런 인물이 되었으면, 이렇게 살았으면’하는 소원을 담아 자(字)를 붙여 주었다. 자는 이름을 상징하기에 이름의 뜻을 반영한 글자를 자로 삼는다.

자를 지어준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후기 문신이 김수항(1629-1689) 선생의 ‘문곡집, 삼형제 자설(三兄弟字說)’로, 이 글은 김수항이 부사를 지낸 김수오의 아들 삼형제의 자를 지어주면서 쓴 글이다. 첫째의 순(洵)은 ‘진실로’라는 뜻으로 신뢰에 관해 말한 ‘주역, 중부(中孚)’ 괘에 ‘헤아리면[虞] 길하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믿을 바를 살피고 헤아려서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진실한 믿음을 얻도록 바라는 뜻으로 여우(汝虞·너는 잘 헤아려라)라고 붙였다. 둘째 징(<7013>)은 ‘맑다’는 뜻으로 맑음을 상징하는 것은 물이므로 맑게 비추려면 고요하고 안정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정해져 있기를 바라는 뜻으로 여정(汝定·너는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여라)이라고 지었다. 셋째의 호(灝)는 감(坎)괘의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물이 거듭 이르는 것이 습감(習坎)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덕행을 한결같이 하며 가르치는 일을 거듭한다’고 하였다. 학문이 넓고 크게 됨은 때마다 거듭하여 익힘에 있으므로 자를 여습(汝習)으로 지었다. 이렇듯 이름은 큰 의미와 가치를 품고 있다.

상대의 이름을 대하는 우리 현실은 너무 훼손하고 폄훼하여 비참할 정도다. 온라인을 통한 댓글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몇 사례를 보면, 김영삼 전대통령을 ‘뻥영삼’, 김대중 전대통령을 ‘핵대중’, 이명박 전대통령을 ‘쥐박이’, 박근혜 전대통령을 ‘닭근혜’, 현 문재인 대통령을 ‘문재앙, 문죄인’, 홍준표 전자유한국당 대표를 ‘홍발정’,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를 ‘이해골’로 조롱하며 폄하하고 있다.

이러한 천박하고 저속한 문화의 확산은 좌우로 나뉘어 서로 발목잡고 당리당략과 정치논리만 늘어놓는 후진적 정치행태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이름이 사람을 귀하게 할 수 없으나, 사람은 그 삶에 따라 이름을 귀하게 할 수 있다. 440년 전 왜적을 막아 조선을 지켰던 이순신이란 이름은 성웅(聖雄)으로, 구한말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의 이름은 최악의 매국노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