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감나무는 다른 과실나무에 비해 해거리가 심한 편입니다. 과실을 너무 많이 단 다음 해에는 힘이 부치는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영 적게 열리는 걸 해거리라 하지요. 그러니까 나무들도 사람처럼 조절이 잘 안 되는 욕심 같은 게 있나 봅니다.

유난히도 감이 많이 열린 해였지요. 어느 하늘 맑은 공일, 산골 우리 집에 학교 선생님 몇 분이 들렀습니다. 골짜기를 따라 놀러왔다가 감나무에 감이 하도나 탐스럽고 고와서 와본 거라 했지요. 어머니는 찢어지게 휘늘어진 감나무 가지를 뚝뚝 분질러 선생님들에게 선사했습니다. 선생님들은 감나무 가지를 하나씩 받아들고 아이들처럼 좋아했지요.

나는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린 것을 보고 어른들이 그렇게 감탄하고 좋아하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이 바다를 보고 감탄하지 않는 것처럼, 산골소년인 나에게는 해거리 다음 해에 감이 많이 열리는 게 하나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지요.

반백년이 지난 지금 나는 모든 자연이 신기하고 감격스럽습니다. 감나무에 해마다 감이, 밤나무에 밤이 열리는 것이 어찌나 신기하고 감격스러운지요. 지난 가을에 떨어진 씨앗에서 어떻게 코스모스가 다시 싹을 틔우고 자라서 저토록 꽃물결 장관을 이루는 것인지 눈물겹도록 신비롭고 황홀합니다.

두메산골 소년시절보다 감성이 더 여리고 풍성해졌다는 얘기가 물론 아니지요. 그때는 그냥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었지요. 그야말로 신토불이(身土不二)로 한몸이었으니 따로 감탄하고 말고가 없었던 거지요. 인생이란 자연에서 부지런히 멀어져 갔다가 나이 들면 수구초심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다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요.

# 젊어서는 사람들이 쓴 책을 많이 읽었지만 지천명 이후로는 주로 하느님의 책을 읽습니다. 자연은 왜곡이나 오류가 없는 교과서요 경전이지요. 봄에는 개나리 진달래를 읽고 신록의 함성을 읽습니다. 밤에는 개구리소리를 읽고 낮에는 뻐꾸기소리를 읽지요. 여름날엔 천둥번개와 매미소리, 녹음 우거진 산과 들, 넓고 푸른 바다를 읽습니다. 장마가 장편소설이라면 반짝 지나가는 소나기는 한 편의 콩트지요.

이번 가을에도 잠자리와 코스모스를 읽고 억새도 읽습니다. 억새가 얼마나 억세게 사는지, 억새의 노후가 얼마나 허허로운지 다시 한 번 감명 깊게 정독을 합니다. 새로 나온 가을호에도 읽을 거리가 참 많습니다.

# 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높이 납니다. 아주 까마득한 높이는 아니고 바지랑대 쳐들면 닿을 만큼의 높이입니다. 저만큼의 높이에서 잠자리들이 내려다보는 세상은 이제 늦가을입니다.

잠자리가 곱고 투명한 날개를 갖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가 않습니다. 학배기란 이름의 유충으로 일 년이나 여러 해 동안 물속에 살면서 열 번 이상 탈피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껍질을 찢는 아픔을 여러 번 겪고서야 우화(羽化)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맘때쯤 잠자리들이 나는 것은 먹이활동이나 번식을 위한 비행(飛行)은 아닙니다. 나뭇잎들이 마지막을 단풍으로 불태우듯, 생의 마지막 한 때를 저렇게 유유한 비상(飛翔)으로 장식하는 잠자리들의 군무(群舞)에 눈이 부십니다.

# 가을에 취(醉)합니다. 풀꽃에 취하고 단풍에 취합니다. 세상을 이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취하려 왔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을은 취하는 계절입니다. 가을 산은 한바탕 풍악(風樂)입니다. 만산홍엽 자진모리로 타오릅니다. 독한 주정(酒精)의 가을볕에 취하지 않은 것은 죽은 것들뿐입니다. “가을볕에 불콰하게 산자락이 취했다// 석양 하늘 지나가던 구름도 취했다// 그 취기 따라가려고 거푸 술잔 기울인다.” -졸시 ‘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