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북 옥천군에 있는 정지용 기념관.
▲ 충북 옥천군에 있는 정지용 기념관.

1988년은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왜냐하면 이 해에 “납월북 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월북을 했거나 납북이 된 문인을 가르칠 수도 없었고 작품을 읽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1988년 이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이기영, 박태원, 김남천과 같은 소설가와 정지용, 김기림, 백석과 같은 시인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 그런 세월이 있었다니 정말 수상한 시대였다. 이 때 해금조치 된 120여 명에 달한다. 이런 시인 중에서도 정지용은 단연 돋보이는 시를 썼다.

정지용은 1902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났고 1950년 9월 납북 도중 폭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시절에 요람동인으로 활동하였고, 일본 교토의 도시샤 대학 영문과를 다녔으며, 일본에서 등단을 할 정도로 시에서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귀국 후에는 휘문고보 영어 교사가 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제직하며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다. 또 경향신문의 주필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대 초 이태준, 김기림, 이상, 박태원 등과 함께 구인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 문학을 이끌었고, 1939년부터는 ‘문장’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의 시인을 등단시켰다.

대표적인 시로는 당대의 많은 시인들과 소설 작품에서 패러디 되어 인용될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카페 프란스’, 아들이 죽은 후 그 슬픔을 형상화한 ‘유리창’, 대중가요로 널리 알려진 ‘향수’, 한라산을 다녀와서 쓴 ‘백록담’ 등이 있다. 이 외에 동시도 많이 썼는데, 유명한 작품으로 ‘별똥’이 있다. 이 시는 매우 짧은데 “별똥 떨어진 곳 / 마음에 두었다 / 다음날 가보려 / 벼르다 벼르다 / 인젠 다 자랐소”가 전문이다. 시집으로는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지용시선(1946) 등이 있다.

정지용의 초기 시는 이미지즘 계열의 시가 많다. 많은 작품 중 여기에서 소개하려는 작품은 1926년에 발표된 ‘슬픈 인상화’다.

수박냄새 품어 오는

첫 여름의 저녁 때……

먼 해안 쪽

길옆나무에 늘어선

전등. 전등.

헤엄처 나온 듯이 깜박거리고 빛나노나.

침울하게 울려오는

축항의 기적소리……기적소리……

이국정조로 퍼덕이는

세관의 깃발. 깃발.

시멘트 깐 인도측으로 사폿 사폿 옮기는

하이얀 양장의 점경!

그는 흘러가는 실심한 풍경이여니……

부질없이 오렌지 껍질 씹는 시름……

아아, 애시리 황(愛施利 黃!)!

그대는 상해로 가는구료….

이 시에는 ‘나’와 애시리 황이 등장한다. 애시리은 아마 애슐리(Ashley)를 음차한 말일 것이다. 그녀의 이름과 그녀가 입고 있는 양장, 그리고 자유연애를 실천하는 모꼬 걸(modern girl)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는 ‘나’와의 사랑 따위는 자신의 삶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시크(chic)한 여성이거나, ‘나’와의 사랑이 너무도 애절했기에 그 사랑의 끝에 이르자 조선을 떠나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이 시는 이러한 ‘나’와 애시리 황과의 이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 이별을 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시를 더 꼼꼼히 읽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 구스타브 카유보트, ‘창가의 젊은 남자’(1875년)
▲ 구스타브 카유보트, ‘창가의 젊은 남자’(1875년)

양산을 받쳐 쓴 그녀는 허리의 윤곽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흰 원피스를 입고,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며, 배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나’는 그녀를 마치 풍경처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완전히 점처럼 작아졌을 때쯤 현실감을 찾은 ‘나’는 그녀가 자신이 사랑했던 ‘애시리 황’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이 도도한 여성은 슬픔도 미련도 없이 ‘나’를 떠나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녀를 붙잡지 않은 것일까. 이 시의 배경이 초여름과 초저녁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비록 더위를 느낄 수 없지만 초여름은 여름으로, 초저녁은 어둠으로 흘러들 것이 분명하다. 여름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둠도 아닌 몽환적인 공간 속에서 ‘나’는 사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별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지금의 상황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슬픈 인상화’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상파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있다. 흰 양장을 한 애시리 황은 인상파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을 닮았을 것이다. 이 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그림이 있다. (물론 이 그림이 정지용의 시보다 훨씬 빨리 그려졌으니 그 반대이긴 하겠지만) 그 그림은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창가의 젊은 남자’라는 그림이다.

그림 속 남성은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거리는 밝고 한산하다. 그리고 한 여성이 서 있다. 자세히 보면 그녀의 몸이 발코니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여성이 지금 남자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겠으나, 앞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는 중이라면 상황은 심각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차가 있고 여성은 마차를 타고 떠나가 버릴지도 모른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벌어진 어깨가 더욱 당당해 보이는 이 남자의 표정이 궁금하다.

이 그림 속 남자 역시 ‘슬픈 인상화’의 ‘나’처럼 이 이별의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림 속 남자는 당당한 척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오지랖이 넓어서겠지만 저런 남자에겐 조언이 필요하다. “아아, 애시리 황!”하고 뒤늦게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뛰어나가 그녀를 붙잡는 것이 좋다.

▲ 공강일<bR>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구스타브 카유보트는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살았다. 1870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법관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그림을 공부했다. 1873년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고등학교인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하였다.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인상파 계열 화가들의 그림을 사 주는 방식으로 당대 화가들을 경제적으로 도우기도 했다. 카유보트는 1848년에 태어나 쉰을 채우지 못하고 1894년이라는 이른 나이에 죽었다. 정지용과는 한 세대 차이가 나지만 공교롭게도 죽은 나이가 서로 엇비슷하다.

정지용이 카유보트의 ‘창가의 젊은 남자’에서 영감을 받아 ‘슬픈 인상화’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이 있다면, 이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다가와 뒤늦게 깨닫게 되며 이별을 체감할 때는 이미 늦었다. 벤야민의 말처럼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 늦었음에 멈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