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얼마 전 텔레비전 인문학 대담 프로그램에서 2018년 이전의 200년 동안 발생한 주요 사건을 ‘08년’ 끝자리로 살펴보니 흥미로운 일이 많았다. 우선 1818년 5월 5일 카를 마르크스가 탄생한다. 1867년 출간된 ‘자본’으로 150년 넘도록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마르크스. 영국의 메리 셸리는 1818년에 장편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한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副題)를 가진 소설에서 그녀는 인간이 생명의 창조주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100년 전으로 소급하면 1918년에 천만 넘는 전사자를 야기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원년이다. 1968년은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열도를 휩쓴 ‘68혁명’ 발발연도다.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열렸고, 1998년에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 사태로 모진 고초를 겪은 해다.

2008년에는 세계금융위기가 촉발된다.

그리고 올해 2018년에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지구촌 마지막 냉전지대의 암운(暗雲)이 걷히기 시작한 원년이다. 실로 많은 사건이 ‘08’년 들어간 해에 일어났다.

우리가 유념하지 않는 1918년 11월 11일은 제1차 대전종전 기념일이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달리던 승용차에 19살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씨프가 두 발의 총탄을 발사한다.

목과 배에 중상을 입은 두 사람은 수십 분 후 절명한다. 희생자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하자마자 러시아와 도이칠란트, 프랑스, 영국 등이 줄줄이 참전하기에 이른다. 그것을 일컬어 1차 세계대전이라 한다. 20세기하면 우리는 이내 ‘문명’과 ‘야만’의 두 얼굴을 동시에 연상한다.

제2∼3차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인 풍요를 가능하게 했던 과학기술문명의 중흥기 20세기. 제1~2차 세계대전으로 미증유의 인류 도살장으로 변모한 야만의 시공간 20세기. 그 첫 번째 흑역사를 알린 사건이 1차 대전이다. 더욱이 1918년 봄에 미국에서 발생해 세계 18억 인구 가운데 6억이 감염되고 5천만을 희생시킨 에스파냐 독감은 우리의 음산한 기억을 더 어둔 색조로 채색하도록 한다.

지난 11월 11일 유럽과 세계전역의 70여 개국 정상은 100년 전 그날의 역사적인 종전을 다각도로 기억하고 추념했다.

적국(敵國)으로 쌍방에게 총구를 겨눴던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과 도이칠란트의 메르켈 총리가 얼굴을 맞댄 사진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크나큰 상흔을 남긴 1차 대전의 교훈을 잊지 않겠다, 그런 대규모 전란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 그 중심에 유럽연합의 핵심인 프랑스와 도이칠란트가 굳게 자리를 지키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는 사진이다. 마크롱은 기념식 연설에서 1차 대전의 교훈을 발판삼아 편협한 국가주의와 포퓰리즘, 타국에 폐쇄적이고 적대적인 노선을 거둬들이자고 촉구했다.

그의 발언은 ‘아메리카 넘버원’을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다.

하지만 기념식에 불참한 트럼프는 파리외곽의 미군 전몰자 묘역을 참배한 뒤 귀국한다. 세계가 지역 블록화와 상호주의로 나가는 시점에 자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의 행동은 1995년에 시작된 세계화에 역행하는 돌출행위로 간주된다.

그런데 어쩌랴! 한반도 운명의 미래가 상당정도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에 달려있음을?! 전임 오바마 정부의 무관심과 무능한 전략적 인내로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야했던 위기의 남북관계가 변화조짐을 보이고 있음은 천행(天幸)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2020년 미국 대선 정국에서 장쾌한 변곡점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1차 대전종전 100주년을 맞이하는 나의 소회다. 그것이 설령 대단한 ‘견강부회(牽强附會)’라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