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태국과 법성포

▲ 석양 무렵의 태국 바닷가. 막막한 어둠이 내리고 있다.

태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세워 “최고”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관광객의 취향에 따라 갈린다.

코끼리 등에 타고 울울창창한 열대의 밀림 속을 돌아보며, 소수 민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자 그 나라를 찾은 사람이라면 태국 북부 치앙마이(Chiang Mai)나 치앙라이(Chiang Rai)가 최고의 여행지로 느껴질 것이다.

반면 20~30m의 물속이 환하게 들여다보이고, 거기서 붉고 푸른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광경을 기대한 사람들에겐 푸켓(Phuket)이나 코사무이(Ko Samui), 파타야(Pattaya) 등에서의 체험이 오래 기억될 것이다.

5번쯤 태국을 여행했다. 그러니, 북부의 산악지대와 남부의 섬 곳곳을 돌아볼 수 있었다.

관광객을 위한 인프라가 잘 조성된 태국은 수도인 방콕(Bangkok)에서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치앙마이, 푸켓, 파타야 등으로 갈 수 있다.

저녁에 출발해 새벽에 도착하는 기차의 침대칸을 이용해 치앙마이로 가서 치앙라이, 치앙콩, 미얀마 국경지대까지를 돌아봤다.

동남아시아 같지 않은 선선한 기후를 즐겼고, 자신이 처한 곤궁한 상황과는 무관하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낙관적인 태국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 파타야 해변에서 ‘법성포 바다’를 보다

태국 북부 여행을 마치고는 값싼 비행기 티켓을 구해 남부 바닷가로 향했다. 푸켓과 피피섬, 코사무이를 거친 후 “한국 관광객이 부산의 해운대보다 더 많다”는 농담이 떠도는 파타야를 찾았다.

찾아간 해변들은 재론의 여지없이 아름다웠다. 푸른 보석의 색깔을 닮은 바다와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하얀 모래, 거기에 멀리 보이는 기암괴석(奇巖怪石) 가득한 섬까지.

그 서정적이고 평화로운 풍경 안에서 유럽과 북미, 중국과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환하게 웃었다. 제가 살던 공간을 떠나온 그들에게 걱정 따윈 없어 보였다.

그러나 늦은 밤, 홀로 거리를 걷다가 발견한 ‘관광지 밖의 풍경’은 낮에 본 ‘관광지의 풍경’과 달랐다. 너무나 달랐다.

거친 바람이 불어오면 곧 날아가 버릴 듯한 조악한 양철지붕의 집들, 시궁창 냄새 진동하는 좁은 골목, 목욕시키지 못한 아기를 안은 10대로 보이는 어린 엄마들….

그 ‘가난의 풍경’이 한국의 1960~70년대를 떠올리게 했다. 서러운 시절은 ‘서러운 문학’을 낳는다. 서늘해지는 가슴으로밖에 읽을 수 없는 시편(詩篇)들.

남도 민요풍의 탁월한 가락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문병란(1935~2015)의 절창 ‘법성포 여자’ 또한 그런 시 중 하나다.

 

▲ 아름다운 푸른 보석의 색채로 빛나는 태국 바다. 그러나, 그 바다에는 눈물도 섞여 있다.
▲ 아름다운 푸른 보석의 색채로 빛나는 태국 바다. 그러나, 그 바다에는 눈물도 섞여 있다.

법성포 여자

마이가리에 묶여서

인생을

마이가리로 사는 여자

주막집 목로판에 새겨 온 이력서는

그래도 화려한 추억

항구마다 두고 온 미련이 있어

바다 갈매기만도 못한 팔자에

부질없는 맹세만 빈 보따리로 남았구나.

우리 님 속 울린

빈 소주병만 쌓여 가고

만선 소식 감감한

칠산 바다 조기 떼 따라간 님

법성포 뱃사공은 영 돌아오지 않네.

어느 뭍에서 밀려온 여자

경상도 말씨가 물기에 젖는데

알뜰한 순정도 아니면서

철없는 옮살이 바다제비

서쪽 하늘만 바라보다

섬동백처럼 타 버린 여자야

오늘도 하루 해

기다리다 지친 반나절

소주병을 세 번 비워도

가치놀 넘어서 돌아올 뱃사공

그 님의 소식은 감감하구나.

진상품 조기는 간 곳 없고

일본 배 중공 배 설치는 바다에

허탕 친 우리 님

빈 배 저어 돌아올

굵은 팔뚝 생각하면 울음이 솟네.

진종일 설레는 바람아

하 그리 밤은 긴데

촉촉이 묻어오는 눈물

여인숙 창가에 서서

미친 바다를 보네

출렁이는 우리들의 설움을 보네.

뱃길도 막히고 소식도 끊기고

징징 온종일 우는 바다

니나노 니나노

아무리 젓가락을 두들겨 보아도

얼얼한 가슴은 풀리지 않네.

용왕님도 나라님도 우리 편 아니고

조기 떼도 갈치 떼도 우리 편 아니고

밀물이 들어오면 어이할거나

궂은비 내리면 어이할거나.

오오 답답한 가슴 못 오실 님

수상한 갈매기만 울어

미친 파도를 안고

회오리바람으로 살아온 여자

만선이 되고 싶은 밤마다

텅 빈 법성포 여자의 몸뚱이도

미친 바다처럼 출렁이고 있구나.

 

▲ 관광객을 상대하는 태국의 노점상들은 생계를 위해 새벽까지 일한다.
▲ 관광객을 상대하는 태국의 노점상들은 생계를 위해 새벽까지 일한다.

‘마이가리(가불)에서 마이가리로 이어지는’ 건조하고 팍팍한 생. 어깨에 기대 울 수 있는 사람 하나 만났으나, 그 역시 ‘가불 인생’일 게 뻔했다.

하지만, 알뜰히 그를 기다리는 마음만은 어떤 새색시 못지않은 여자. 그 기다림의 고통과 아픔을 폭음과 울음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그녀. 맞다. 비극적이지 않은 삶이 지구 위 어디에 존재하랴.

세상 어디 한곳 몸 붙일 곳 없어 떠돌고, 떠돌다가 결국은 후미진 포구에서 ‘섬동백처럼 까맣게 타버린’ 사람이 어디 문병란의 시에 등장하는 이 여자 하나뿐일까?

한국인의 절대다수가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던 40여 년 전이라면 ‘법성포 여자’는 ‘포항 여자’가 될 수도 있고, ‘제물포 여자’가 될 수도 있으며, ‘서귀포 여자’나 ‘부산항 여자’도 될 수 있는 게 아니었을까.

▲ 그날 밤, 슬픔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괴이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여행지에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가 뭐라고 낯설고 물선 이곳에 와서 가난하지만 선량하게 사는 이들의 삶을 동정하고 평가하려는 것인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그렇다.

간난신고(艱難辛苦) 태국의 빈민촌을 목도하고 돌아온 밤. 멀리서 철썩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문병란 시인을 흉내내 아래와 같은 졸시를 쓴 것은 그 미안함과 부끄러움 탓이었을 게 분명하다.

우리는 누구인가?

놀러온 이들에겐 파타야의 밤이 짧다

제 나라 콜라 한잔 값으로 좌충우돌 진행될 흥정이 즐겁다

배낭은 무겁지만 삶이란 더없이 가벼운 것

일 년 내내 햇살의 세례를 받는 이곳은 천국이 아닐까

꾸벅꾸벅 꺾이는 목으로 겨우겨우 버텨내는 밤

대체 당신들은 언제가 돼야 잠을 자는가

1달러짜리 액세서리는 오늘도 팔리지 않고

여동생은 매일 같이 비키니 입고 관광객 앞에서 춤을 춘다

썩어가는 과일 향기를 실어온 바람에게 묻는다

이 도시는, 이 나라는 대체 누구의 것인가

두리안 냄새를 싫어하는 이들로부터 밥을 얻는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구창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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