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고흥이 어디 붙었는지, 정말 실례지만, 잘 알지 못했다. 가만 있자, 어떻게 알고 있었더라? 이 고흥이라는 곳은?

우선 고흥은 작가 전성태의 고향인 줄로 안다. 물론 고흥 땅이 전부 전 작가 것은 아니겠지만. 젊어서, 그러니까 삼십 대 중반경에 만나 술도 마시고 당구도 치고 문학 얘기도 제법 심각하게 나누던 댓 살 아래 후배가 바로 전성태 씨다. 성품 좋아 남에게 싫은 소리 하기 어려워 하지만 고집도 있고 의지도 있고 감식안도 있어 귀하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나혜석에 관한 논문을 쓰는데 고흥이 등장해서 눈여겨 보았다. 수원 여자 나혜석이 일본 유학 가서 소월 최승구를 사귀었는데, 폐결핵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혜석이 수원에 있는데 그의 형으로부터 고흥에 와달라는 전보가 왔다. 혜석은 외면하고 부산으로 가서 현해탄 바다를 건너려는데 또 전보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혜석은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나흘을 걸려 부산에서 고흥까지 갔다니 그때 교통 사정이 어땠으며, 고흥은 또 얼마나 먼 곳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때 끝까지 병든 애인을 외면할 수 있었다면 혜석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시집도 안 간 여자가 남자 집에 가서 며칠을 머물렀으니 제대로 시집 가기 어려웠을 것이요, 때문에 김우영이라는 상처한 나이 많은 남자 만나 결혼해야 했다. 지혜롭지 못했다고 해야 하나 정말 외면했다면 예술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고흥은 다시 프로 레슬러 김일의 고향이다. 고향이 고흥군 금산면 어전리 거금도다. 난 사람은 아무리 막아 세워도 제 갈 길을 간다고 1929년생인데, 1956년에 역도산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밀항죄로 형무소 신세까지 진후 레슬러의 길을 열었다. 1970년대가 나의 유소년 시절이었는데, 흑백 텔레비전이 집에 생긴 것은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사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김일이 일세를 풍미했다 해도 과언 아닐 것이다. 안토니오 이노키도 기억나고 천규덕도 기억나고 나중에 이왕표도 기억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역시 김일이다. 일본 선수 반칙에 이마가 찢기고 피가 흐르는데도 막판에 가서 그 이마로 박치기를 해서 상대를 매트에 눕히고야 하는 신공에 사람들은 열광을 했다. 작가 전성태가 김일을 기려 ‘퇴역 레슬러’라는 소설까지 썼으니 고향 선배에 대한 오마주를 바친 셈.

고흥을 너무 쉽게 봤다. 고흥 사람 송수권 시인 관련으로 간다고 간 것이 케이티엑스 타고 여수까지 흘렀다. 아뿔싸. 순천에서 내리든, 아니면 아예 버스라도 탈 것을. 세상에, 서울에서 지금 고흥같이 먼 곳은 다시 없을 것이다.

 

올 때는 어떻게 왔나. 비평 하시다 이명증을 얻은 후 시를 쓰시는 신덕룡 선생 차를 얻어타고 광주까지 오기는 왔다. 광주서 대학 선생 하는 박순원 시인 생각 나 갔더니 옛날 제자 박일우 선생까지 만나 한 잔 하고 정말 오랜만에 심야 고속을 탔다.

프리미엄 버스라는 게 새로 생겼다는데 그걸 탔으면 두 발 완전히 뻗고 누워서 올라올 것을. 고흥. 풍광도 음식도 좋기는 좋은데 고생할 각오쯤은 해야 갔다 올 수 있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