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성태서예가
▲ 강성태서예가

만산홍엽으로 가을날이 익어가는 시월의 어느 저녁, 산들바람 결에 시 읊는 소리 잔잔하게 들리는 인근의 향교를 찾았다.

고색창연한 전통건축 구조의 명륜당 대청에 앉으니 굿거리장단을 방불케 하는 난타공연에 어깨가 저절로 들썩이고, 낭랑한 목청으로 읊조리는 시 구절에 가슴이 젖어 들기도 하며, 대금 가락을 타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시조창이 가을밤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공연은 (사)한국예절녹색교육원에서 주관하는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의 일환으로 연일향교에서 열린 ‘시(詩)가 있는 야(夜)한 향교’의 연중 프로그램 중 일부다. 문화재청 공모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은 향교, 서원 문화재에 의미와 가치를 인문정신 함양, 교육, 공연, 체험, 관광자원 등으로 창출하기 위한 문화재 향유 프로그램이다.

한국예절녹색교육원은 시 낭송 프로그램 외에도 청소년 성년식, 충효예절학당, 여군자의 풍류, 전통혼례 등을 테마로 시민들과 학생들이 동참하여 우리의 전통 예속(禮俗)과 선비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향교의 현대적인 계승사업이랄까, 조선시대의 공립 교육기관으로 강학(講學)과 제향(祭享)의 기능을 담당했던 향교가 문화재 활용사업을 통해 시민들을 품으며 예의범절 교육과 고유풍습을 전수하고 풍류를 즐기는 어울림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으니 한결 고무적인 일로 여겨진다.

현란한 도심과 번잡한 일상의 한 켠에서 마실 나가듯이 편하고 부담없이 향교에 모여들어, 시와 창(唱)을 음미하고 옛 가락과 장단에 녹아 들어 짧게나마 문화생활을 누린다는 것은 얼마나 넉넉한 일일까? 낡고 옛 것이라 해서 방치하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애써 다듬고 찾아 현대적인 요소를 접목하고 가치를 부여한다면 그 멋과 맛이 한층 깊고 새로워지지 않을까?

물론 향교나 서원같은 소중한 문화재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측면도 중요하겠지만, 먼지 쌓이고 굳게 닫힌 동재(東齋)나 서재(西齋)의 사랑방에서 다담을 나누고 대청에서 시회(詩會)를 열며 창과 곡조를 타는 일은, 향교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일이다. 향사(享祀)를 지내기 위해 1년에 1~2번 정도 향교의 문을 열던 것을, 이 같은 문화재 활용사업으로 인해 사람이 자주 왕래하고 소통하며, 시와 예악(禮樂)을 공유하고 곳곳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향교는 비로소 긴 잠을 털고 현시대와 함께 호흡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옛 것을 알고 살펴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켜 새로움을 찾는 지혜야말로 보다 밝은 내일을 준비하는 문화시민의 사려깊은 안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향교서원 뿐만 아니라 지역 문화재 활용사업은 고택, 사찰, 선열의 발자취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추진되고 있다. 2019년 문화재청의 경북지역 문화재 활용사업은 생생문화재사업, 문화재 야행(夜行), 전통 산사 문화재 활용사업 등 총 37곳이 최근 선정됐다. 선조들의 얼과 자취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유무형의 문화재와 연계한 이러한 사업은 우리의 고유한 풍습과 문화를 바탕으로 현재의 다변화된 생활양식을 수용하는 퓨전전통문화를 창출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것은 곧 우리의 뿌리를 굳건히 지키면서 전통문화의 글로벌화를 지향하는 시도이자 자긍심을 키워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 봄부터 현재까지 네 차례 ‘시가 있는 야한 향교’를 찾았었는데, 매번 참석할 때마다 느낌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난타공연을 시작으로 여는 시를 비롯, 새내기 시, 잇는 시, 닫는 시를 낭송하고 나면 시조창과 대금 연주로 공연이 마무리되지만, 이 날은 청중들의 요청으로 대금 연주에 맞춰 동요 몇 곡을 합창하며 깊어가는 가을밤의 흥취를 정겹게 누릴 수 있었다. 청아하게 피어나는 시의 향기 속에 잿빛 기와지붕 위로 기웃대던 달마저 설레는지 가던 길을 멈추고 더욱 환하게 웃음짓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