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살며 생각하며 34

서촌이라.

경복궁 서쪽에 있어 서촌이다. 옛날에 서인들이 여기 많이 살았다고 한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오면 요즘에는 연탄불로 밤을 구워 파시는 군밤장수 아저씨가 있다. 굽는데 꽤 시간 걸리는데 굽는 대로 바로 팔려 마음 바쁘시다.

몇 발작 나오는 방향으로 걸으면 파리 바케트 골목. 금천교 시장이라는 옛 사라진 다리 이름 딴 시장 골목이 나온다.

며칠 전에는 체부동 잔치집에서 강해진 바이올리니스트 공연 뒤풀이를 했다. 마임이스트 유진규 선생, 영화감독 장권호 씨, 칼국수, 파전 등을 놓고 담소를 나눴다.

골목 안에는 싱싱한 해물을 파는 계단집을 좋아한다. 저녁에는 줄 서서 기다리는 이 집, 비단멍게나 돌멍게 좋고, 소라를 쪄 내오는 것도 좋고, 해물라면 시원하다. 일하시는 분들 친절 만점인 것은 주인장의 인심도 짐작하게 한다.

조금 더 들어가면 김문 기자 단골인 통영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필운동 길 쪽에 ‘통영’이라고 써 붙인 음식점이 있던데 그 집이 이사간 곳 아닌가 한다. 전대감집은 지나치느라 못 본 것 같고, 곧 ‘심산애’라는 이름 멋진 막걸리집이 나온다. 주인 아저씨는 산사람, 대개 가게 지키는 분은 아주머니, 해남 막걸리에 생더덕 갈아 넣어주는 생더덕 막걸리가 일품이다. 마시면 취하는 게 술이라지만 이 막걸리는 취기가 어느 높이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마시면서 깨게 하는 효능이 있는가.

이제 필운동 길로 나오면 누하동 쪽 조금 걸어 박미산 시인의‘백석 흰 당나귀’가 나온다. 시집 “숨은 벽”을 내고 여기서 낭송회를 열었는데, 그때 김추인 시인께서 반갑게 오셨고, 강해진, 장권호 두 분도 자리를 같이 했다.

한국화가 청전 이상범 선생의 한옥집도 이 길가에 있다. 공주 사람, 오원 장승업에서 심전 안중식을 거쳐 청전과 심산 노수현 등으로 이어지는 현대 한국화의 줄기를 생각한다. 소정 변관식의 산수화에 관심이 갈 때, 청전의 이름 석 자를 얻어들은 게 처음이었지만, 그후 일제 때 신문 연재소설들 삽화들에 이 분의 이름이 많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금메달 딴 손기정 선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먹으로 없앤 이가 바로 청전, 당시 사회부장이던 작가 현진건은 일 년이나 옥고를 치렀다.

더 걸으면 누각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 통인 시장 위쪽 입구가 있고 세종대왕 나신 곳이 바로 근처다. 여기서 인왕산 쪽으로 9번 마을버스 가는 길로 좌회전 해서 오르면 옛날 오락실도 나오고 곧이어 ‘우리’ 윤동주 하숙집이다.

연희전문 마지막 해 대여섯 달을 보낸 이 하숙집 주인은 소설가 김송, 여기서 윤동주는 후배 정병욱과 함께 아침이면 인왕산 계곡에 올라 세수를 했다. 그리고 그 계곡이 바로 ‘운영전’의 공간 안평대군의 옛집터이비도 하다. 나는 여기서 스물아홉 아름다운 나이에 세상 떠난 동주를 기리며 인생의 비애와 역사의 성쇠를 생각한다.

이제 숲 사이 길 2킬로미터를 오르락내리락 걸어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으로 간다. 숲 사이로 가시거리 좋은 날의 서울 풍광이 펼쳐진다. 시월. 단풍 곱게 든 인왕산 숲속, 시름 잊고 달관 익히기 좋은 곳이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