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학교 밖 청소년에게 월 20만원 수당 주겠다.”(서울시교육청)

“안 해도 되는 것을 왜 굳이 하고자 합니까?”(경북교육청 관계자의 말) 독자 여러분께서는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

전자는 지난 주 교육계 뉴스 중 단연 으뜸이었던 뉴스 제목이다. 비록 상반된 반응이 나오는 서울시교육청의 계획이지만, 그래도 없는 조례까지 만들어서라도 뭔가를 하려는 모습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더군다나 지원 대상이 학교밖 청소년이라는 말에 부러움은 하늘을 찌를 뿐이다. 그런데 경북교육청은 어떤가? 변화 불가, 아니 변화 거부가 맞은 말일 수 있겠다.

지역이 달라서인지, 아니면 문화가 달라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 보수 피(血)와 진보 피(血)가 따로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르다. 편견일 수 있지만 수도권 지자체들은 뭔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때론 그것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 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새로운 이야기들은 조직을 정체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정체된 물은 썩기 마련이다. 이 자연의 원리는 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의 조직에서는 이 원리가 더 엄격히 적용된다. 움직임이 없는 사회는 곧 죽은 사회다. 죽은 사회에서 변화나 성장같은 발전적인 것을 바라는 것은 모순이다. 모순은 또 다른 모순을 낳는데, 그것은 자기 합리화, 아집, 고착, 퇴행 등으로 나타난다. 경상북도 교육청처럼!

며칠 전 학생이 전학을 갔다. 학생이 전학을 가면 그 학생의 활동이 기록된 서류들을 온라인으로 보낸다. 그러면 상대 학교에서 서류 내용을 보고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수정을 요청한다. 양교 간에 서류에 대한 확인이 끝나면 전학은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번에 전학 서류를 정리하면서 필자는 교직 사회의 퇴행(退行)에 대해 확실히 보았다. 물론 서류를 오류없이 완벽하게 해서 보내는 것이 맞다.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학교생활기록부 기재요령’이라는 책자도 있다. 사실 필자는 형식화의 극치인 이 기재요령이라는 책자를 볼 때마다 마음이 답답하다. 왜냐하면 요령을 안내하기보다는 하나의 고정틀을 만들기 때문이다. 학교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모든 교사들은 이 틀에서 조금이라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펄쩍 뛴다.

이번 또한 마찬가지였다. 몇 년 전 생활기록부 내용에 온점이 하나 빠졌다고 수정 대장까지 작성해서 보내달라는 말에 필자는 헛웃음밖에 나지 않았다.

세상의 변화를 선도하기 위해 가장 유연해야 할 곳이 학교와 교육청(부)이다. 그런데 기재요령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교사들이 있는 학교와 그것을 강요하는 교육청은 유연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도 멀다. 분명 한 때는 학교가 사회 변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지금 학교는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주범이 되어버렸다. 가장 창조적인 방법으로, 가장 창조적인 학생을 길러내야 할 학교가 창조와는 완전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경북 교육, 대한민국 교육의 표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경북교육청의 슬로건이다. 경북 도민의 한 사람으로서 경북교육청이 대한민국 교육에 다시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교육의 표준을 제시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경북 각지에 경북의 앞선 교육을 받기 위해 전국에서 온 학생들로 넘쳤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해야 한다. 없는 것도 만들어 내야한다. 무사안일주의에 빠져서는 절대 표준을 제시할 수 없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학생이 찾아오는 지자체가 아닌 학생이 떠나는 지자체가 될 것이다. 이미 많은 학생이 떠났지만 말이다. 이번에도 필자는 희망적인 이야기보다 “안 해도 되는 것을 왜 굳이 하고자 합니까?”라는 말을 너무도 당연하게 하는 경북교육청 어느 직원의 말을 전할 수밖에 없다. 정녕 경북 교육과 변화는 거리가 먼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