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에서 스핑크스는 ‘지평선상의 매’를 나타내는 태양신의 상징이다. 이러한 스핑크스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물의 왕 사자에 대한 숭배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오이디푸스에서는 사람을 해치는 괴물로 등장한다. 신의 위상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하향한다. 인간에 대한 위상이 그러하듯 말이다.
▲ 이집트에서 스핑크스는 ‘지평선상의 매’를 나타내는 태양신의 상징이다. 이러한 스핑크스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물의 왕 사자에 대한 숭배로 바뀐다. 그리고 다시 오이디푸스에서는 사람을 해치는 괴물로 등장한다. 신의 위상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하향한다. 인간에 대한 위상이 그러하듯 말이다.

△이중사고

조지 오웰의 유명한 소설 ‘1984’에서는 ‘이중사고’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윈스턴은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생각은 이중사고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진실을 휜히 알면서도 교묘히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철회된 두 가지 견해를 동시에 지지하고 서로 모순되는 줄 알면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믿는 것, 논리를 사용하여 논리에 맞서는 것, 도덕을 주장하면서 도덕을 거부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 당이 민주주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 잊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든 잊어버리고 필요한 순간에만 기억에 떠올렸다가 다시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자체에다 똑같은 과정을 적용하는 것… . 이런 것들은 지극히 미묘하다. 의식적으로 무의식 상태에 빠지고, 자신이 방금 행한 최면 행위에 대해서까지 의식하지 못하는 격이다. 그래서 ‘이중사고’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조차 이중사고를 해야만 한다(53면).

이러한 ‘이중사고’는 ‘1984’와 같은 기형적인 세계 속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히 말한다면 ‘이중사고’는 이미 우리의 일부입니다.

△오이디푸스라는 괴물

오이디푸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군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할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게 된 오이디푸스는 이 운명을 피하기 위해 테베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오이디푸스는 얼굴은 여자이며, 몸은 사자이고, 거기에 날개까지 달린 새이기도 한 삼종혼합 괴물 즉 스핑크스를 만납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아침에는 네 발로, 낮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였고,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답합니다.

이에 대한 베르낭(Jean-Pierre Vernant)의 해석은 독특합니다. 베르낭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자식(네 발)→나(두 발)→부모(세 발)’라는 세 세대의 응축으로 읽어냅니다. 세 세대가 응축된 존재가 바로 오이디푸스인 것이죠. 왜냐하면 오이디푸스는 우선 ‘자기 자신’이며, 어머니와 결혼했으므로 스스로 ‘아버지’가 되었으며,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자식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자식들’과 형제지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함의된 물음은 “너는 누구인가”입니다. 이 물음에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말했지만, 스핑크스는 더 구체적인 인간에 대해 말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면서, 아버지이면서 자식인 오이디푸스를 말입니다. 최종적으로 자신을 참을 수 없어 눈을 찌르고 마는 그런 오이디푸스 말입니다. 스핑크스가 죽으며 유언을 남기진 않았지만 오이디푸스에게 이런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너는 나와 같은 삼종혼합 괴물이다.”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눈을 찌르고 황야를 방황했던 오이디푸스도 저희에게 이런 말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인간은 언제든 나와 같은 괴물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자신의 욕망을 몸속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변증법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요. 오이디푸스의 내부에 이미 괴물이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이 괴물을 억압하기 위해 혹은 제거하기 위해 방황을 했지만, 그 괴물은 끝끝내 되살아나고 말았다고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정의 부정 혹은 변증법입니다.

우리는 변증법을 쉽게 “정→반⇒합”의 도식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反)’은 ‘정(正)’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을 부정해서 생긴 것이 ‘반’입니다. ~A(not A)가 A를 포함하지 않고서는 ~A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오이디푸스는 한 번 부정하여 스핑크스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부정에 다시 부정이 가해지면 자신과 스핑크스가 더블(double)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이디푸스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스핑크스가 자신의 내부에서 살아나 자기 자신이 됩니다. 그러니까 변증법은 내가 부정하려 했던 것, 내가 억압하려 했던 것, 내가 제거하려 했던 ‘나’를 만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나’는 내가 알던 ‘나’가 아닌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존재합니다. 알 수 없는 것을 대할 때 느끼는 것, 그것이 불안이며 공포입니다. “네가 아직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말이 무서운 이유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오이디푸스가 위대한 것은 자살함으로써 자신을 보존한 것이 아니라 눈을 찌름으로써 ‘괴물’인 자신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는 우리의 내부에도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셈입니다.

△에얼리언(alien) 되기

변증법이란 결국 부정의 부정을 통해 외부라고 여겼던 것을 내부로 가져오는 일 혹은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 그리하여 우리 속에 존재하는 공백을 발견하는 일일 것입니다. 변증법은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무너뜨립니다. 나의 외부에 존재한다고 여겼던 것을 내부로 옮긴다는 것은 그 위상을 바꾼다는 점에서 나의 위상학을 재설정하게 만듭니다. 다음으로 그 외부로 인하여 나에게 어떤 결과로 작동한다는 선후 관계를 뒤집는다는 점에서 시간의 질서를 파괴합니다. 변증법이 작동할 때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변하고 우리는 다른 존재로 변신합니다. 내 안에 있던 내가 나를 삼키고 마는 것이지요. 그래서 변증법은 에얼리언(alien)되기인 것입니다. ‘공백’을 발견하는 것이므로 바디유는 변증법을 ‘뺄셈’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니체의 영겁회귀 역시 여기에서 멀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부정의 부정’ 형식을 가진 대표적인 영화 장르가 느와르입니다. 느와르에는 대개 형사가 등장하고 형사는 범인을 쫓습니다. 하지만 종국엔 그 범인이 자신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른다는 것은 ‘나’이고 싶지 않은 ‘나’와 함께 머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간극을 메우려는 노력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떻게든 메우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대타자를 상정합니다. 완전무결하고 지고의 가치를 가진 대타자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입니다. 그런데 불순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인류를 구원한 예수 역시 이러한 분열적 존재 혹은 간극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그것도 오이디푸스와 동일한 삼종 종합 괴물인 것입니다. 예수 역시 성부이자, 성자이며,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