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출신의 민족시인 이육사가 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20년 17세가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오면서부터다. 1937년 서울로 옮겨갈 때까지 17년간 대구에서 보냈다. 17년 기간 중 영천에서 혹은 일본 동경에서의 대학생활 시절도 있었으나 대구에서의 거주 기간이 적지 않았다.

또 독립운동가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 투옥되고, 그의 수의번호 264가 뒷날 아호가 된 것도 대구와는 유별한 인연이라 말할 수 있다. 1930년 그의 첫 시 ‘말’이 발표된 것도 대구에서의 일이다. 그는 중외일보 대구기자로 활동도 했으며 이육사라는 필명을 알리기 시작한 무렵의 주무대가 대구였다. 대구는 그에게 시인으로서 또는 독립운동가로서 맹활약한 배경지였다.

이육사는 23세의 나이에 투옥되는 등 17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조국의 독립을 누구보다 갈망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시에서 표현한 청포도는 독립을 기다리는 조선의 모습이다. 덜 익어 푸른색을 띠는 풋포도를 독립을 기다리는 조선의 모습으로 비유한 것이다. 또 광야에 목 놓아 부르게 하고 싶은 백마를 탄 초인의 모습에서 민족의 울분과 희망을 표현했다.

민족의 슬픔과 조국 광복을 염원했던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를 기리는 이육사문학관이 그의 고향인 안동에 세워진 것이 2004년의 일이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소박하게 지어진 문학관 뒷산에는 그의 묘소도 있다. 생가터 옆에는 시비 동산도 만들어져 있다.

이육사가 대구에서 거처했던 남산동 대구집이 철거 위기에 놓였다. 대구시가 활용 방안을 놓고 고심하던 사이 아파트 재개발 지역에 포함된 것이다. 이미 건물 외벽이 허물어지는 등 건물로서 가치를 상실한 현장을 본 시민들의 마음이 왠지 착잡하다.

대구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민족시인 이육사의 역사적 흔적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없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의 역사적 체취가 남아있던 그곳에 그를 기억할 작지만 의미있는 기념물 하나가 있으면 좋겠다. 역사란 후손이 다듬고 보존할 때 그 가치가 커지는 법이다.

/우정구(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