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살며생각하며 32

돌아가신 큰 스님이 법석에서 하안거 해제 말씀 하시던 게 기억난다. 당신은 법이 없어 할 수 있는 말이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어떠어떠하게 해야 불도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절차나 방법 같은 게 있을 텐데 당신은 그런 것을 익힌 적 없으시다는 뜻이었다.

내가 문학 공부 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비슷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법식이 없었다. ‘기초’부터 ‘기본’, ‘핵심’을 거쳐 ‘종합’에 이르는 법을 갖지 못한 채 늘 부족함에 허덕였다. 이런 저런 변통과 보수에 시달렸다.

이런 상태는 한편으로 딱하고 한편으로 부끄럽다. 이래 저래 발로 뛰고 손으로 헤집는 공부 아니면 소득 없을 공부. 그러면서 최근 관심 갖게 된 선각자 한 분이 바로 도산 안창호(1878년 11월 9일~1938년 3월 10일)다. 다들 알 듯 흥사단을 세운 분이다. 1913년 5월 13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했다.

도산이라는 존재가 한국현대문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그와 춘원 이광수의 관계를 물을 때다. 3·1운동 직후 안창호 선생이 상하이로 와 장차 도래할 민족 독립을 준비하고자 했다. 그때 이광수가 2·8 독립선언을 기초하고 그곳에 가 흥사단 원동 지부에 가입한 첫 사람이 된다.

이광수 하면 ‘무정’인데, 최근 십 년 간 국문학계는 도대체 ‘무정’의 이 ‘정(情)이 무엇이냐를 두고 설왕설래 했다. ‘정’은 와세다 미학에서 왔다, 일본 작가 누구들에서 왔다, 칸트에서 왔다, 서양 노블을 이식해 오다 왔다 등등.

그런데 안창호 글 가운데 ‘무정한 사회와 유정한 사회’라는 것이 있다. 또 이광수는 안창호와 그의 신민회를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도쿄의 태극학회 연설회로, 황해도 악양면학회로, 오산학교 선생 등으로 계속해서 접촉해 온 묘한 사실이 있다.

요컨대 이광수는 안창호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다. 이광수의 ‘정’은 안창호의 무정, 유정 사상에 직접 관련된다. 선생은 “정의 돈수(情誼 敦修)”를 말했다. 한 마디로 “따뜻한 마음을 북돋우라”. 그렇게 해서 무정 사회가 가고 유정 사회가 오리라 했다.

이광수 소설 ‘무정’을 늘 근대화 하자는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안창호에 이광수를 비추면 그는 무정한 근대를 넘어 유정한 사회, 근대의 모순을 초극한 사회를 만들자고 한 셈이다.

이제 안창호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모른다. 우리 선배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남의 아비만을 제 아비로 아는 악습 때문이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