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논설위원
▲ 안재휘논설위원

지난 8월 26일, 임명된 지 1년 남짓밖에 안 된 통계청장이 석연찮은 이유로 전격 교체됐을 때 정치권 내외의 반응은 격렬했었다. “‘소득주도성장’이 안 되니 ‘통계주도성장’ 하자는 거냐”는 비난에서부터 “기상청장 바꾸면 날씨가 바뀌느냐”는 비아냥에 이르기까지 여론은 대체로 곱지 않았다. 집권 더불어민주당의 정책에 대해서 대략 박수를 치고 있는 민주평화당에서 내놓은 당시의 반응은 두고 기억에 남는다.

평화당 홍성문 대변인의 논평은 ‘정부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자르는 우를 범하질 않길 바란다’라는 제목부터 대단히 이례적이고 맵짰다. “국민들의 눈을 속이려는 또 다른 시도에 불과한 것”이라는 힐난까지도 들어 있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사자성어는 ‘달을 보라고 손을 들어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본다’ 정도로 직역이 된다. 본질을 외면한 채 지엽적인 것에 집착한다는 뜻을 달과 손가락에 빗대고 있다. 제아무리 비판적인 견해가 쇄도해도 날이 갈수록 오히려 정책추진의 강단(剛斷)이 높아지는 문재인 정부의 통치행태를 놓고 이 사자성어를 동원하는 지식인들이 늘고 있다.

추석연휴 전날 감행된 심재철 의원실 및 소속 보좌관 3명의 자택 ‘기습’ 압수수색과 잇따른 제소전으로 촉발된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격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김병준 비대위원장 및 김성태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는 압수수색과 고발 사태를 “명백한 야당 탄압”이라고 규정하며 날선 대여투쟁에 돌입했다. 정부여당은 심 의원의 정보취득이 불법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는 목적의 가치 못지않게 수단의 적법성을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불법하게 취득한 정보자산은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얘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현재의 집권세력 역시 그런 ‘특수한 경우’를 충분히 활용하여 과거 야당시절에는 대여투쟁의 이슈를 만들어왔고, 현재는 ‘정치보복’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편법까지 동원하여 ‘적폐청산’의 빌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심재철 의원이 확보한 청와대 등 공직자들의 47만 건 지출내역을 둘러싼 여야 정치권의 공방을 지켜보노라면 과거 언젠가 많이 본 듯한 논리와 형용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해 강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야말로 공수교대(攻守交代)의 유치한 되풀이다. 정치권의 지독한 건망증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라고나 할까. 아니, 빤히 알면서도 거듭 주고받는 뻔뻔한 상호논박은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오늘 ‘달’의 실상을 강조하는 편은 분명 지난 날 ‘손가락’을 강력 시비했던 쪽이다. 예전에는 정확하게 그 반대였다. 제아무리 상황에 따라서, 형편에 따라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궤변을 일삼는 게 정치라지만, 이건 정말 너무 심하지 싶다. 심재철 의원이 알아낸 ‘달의 비밀’은 일단 낱낱이 공개되고 검증되는 게 옳다. 심 의원이 의적이냐, 도적이냐는 또 다른 문제다.

‘도덕성’을 무기삼아 권력을 잡은 정치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은 바로 그 ‘도덕성 시비’의 덫이다. ‘특활비’ 기록을 낱낱이 까발려 의법 처리하는 방법으로 혹독하게 전개해온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 지금껏 다소나마 용인된 것은 자신들은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예단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 측면에서 심재철 의원이 확보한 특활비 자료내용은 휘발성이 대단히 높다. ‘달’과 ‘손가락’ 사이, 그 아찔한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 민초들은 어지럽다. ‘달’이든 ‘손가락’이든 둘 다 마냥 온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이번 논란이 결과적으로 정치진화의 한 이정표가 될 것임을 믿고 싶다. 어쩌면 지금까지 ‘적폐청산’ 운동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10대0, 100대0의 야릇한 게임의 비밀이 풀릴지도 모른다. 화들짝 놀라 예민하고 기민하게 극렬 반응하는 기획재정부와 청와대의 움직임에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