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창원 수필가
▲ 박창원 수필가

우리나라는 민주국가다. 1990년대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적어도 정치적 민주주의는 완성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미투 운동이나 갑질 논란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 일상 속의 민주주의는 뒤처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민주주의의 핵심 이념은 평등이다. 미투 운동이나 갑질 논란 속 ‘을’의 반란은 평등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된다. 남성과 여성, 강자와 약자 관계에서 불평등을 해소해 달라는 요구이다.

얼마 전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제3차 건강가정기본계획(2016~2020)은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다시 말해 일상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정부 차원의 계획이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계획의 요지는 이렇다. 우선 빨래, 청소, 음식 준비 등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평가하는 ‘가계생산 위성계정’을 개발하기로 했다.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파악해 양성평등한 가족관계 형성을 돕겠다는 취지다.

가족 내 성차별적인 호칭 문제도 개선한단다. 2016년 국립국어원 조사에 따르면 남편의 동생을 ‘도련님’이나 ‘아가씨’로 높여 부르는 데 반해, 아내의 동생은 ‘처남’, ‘처제’로 부르는 것에 대해 응답자의 65%가 개선돼야 한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부계에 ‘친할 친(親)’자를 붙여 친가라고 부르고, 모계를 ‘바깥 외(外)’자를 써서 외가라고 부르는 것이나,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장인, 장모’도 개선돼야 할 호칭으로 꼽힌다.

아울러 자녀의 성과 본을 결정하는 시점을 혼인신고 때에서 자녀출생 때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한부모 가정이나 미혼모 가정에서 친부가 자녀의 존재를 알게 되더라도 아동의 성을 기존대로 유지하되, 아동의 의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개선할 방침이라고 한다. 한부모 가정이나 미혼모부 가정의 아동들이 차별을 받지 않도록 출생신고서에 ‘혼인 중·혼인 외 출생자’를 구분해 표기하는 방식도 개선한다. 주민등록표에 ‘계부·계모·배우자의 자녀’ 등의 표시도 삭제하는 등 다양한 가족 형태와 관련한 불합리한 법과 제도적인 차별 사항을 없앤다는 취지다.

이번에 발표된 건강가정기본계획을 보면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 계획은 여성가족부에서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 진일보한 계획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이것 말고도 남성과 여성 간 불평등 요소들이 많은데, 이것들은 왜 개선사항에 넣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표적인 것이 장례문화이다. 장례식장에 가서 문상할 때를 떠올려 보자. 빈소에 들어가 먼저 고인을 향해 절을 하고, 일어나서는 오른쪽에 있는 상주와 맞절을 한다. 상주석에는 보통 고인의 아들과 사위가 자리해 있다. 그들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전하고 일어서면 뒤쪽에 상복을 입은 여성들이 서 있다. 고인의 며느리이거나 딸이다. ‘이분들과도 절을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잠시 들지만 또 엎드려 절을 하기가 뭣해 선 채로 목례만 하고 물러서는데, 왠지 어색하다. 같은 자식인데, 여성들은 상주 예우를 못 받고 있는 셈이다. 남녀를 구분하지 말고 같이 세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관습이기에 누구도 고치려 들지 않는다.

제례문화도 그렇다. 보통 제사는 남자들끼리만 지낸다. 여자들은 주방에서 제사 준비만 한다. 며칠 전부터 제수를 준비하느라 바빴고, 당일은 집에서 하루 종일 전 부치고 나물 무치고 한다고 애썼건만 정작 조상님을 만나고 음복을 하는 건 남자들이다. 여자들은 제사를 지내면 안 되는 걸까? 이처럼 민주사회에서 여자들은 후손 대접도 못 받는다.

건강가정기본계획이 가족 내 구성원 간 평등이 실현되는 일상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이런 문제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뿌리깊은 유교에 바탕을 둔 상례나 제례문화를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걸 놔두고 일상민주주의 운운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이번 계획에 빠졌다면 다음 계획에 반드시 넣어 일상민주주의를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