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수령 68년만에 폐지

정부는 11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4·27 남북정상회담의 후속 조처를 뒷받침할 판문점선언 비준동의안을 의결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선언을 채택한 지 138일 만이다. 또 군사독재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아온 위수령이 생긴지 68년만에 폐지됐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11일 국무회의에서 비준동의안을 의결한 뒤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며 “판문점선언 이행에 필요한 비용추계서도 함께 제출된다”고 발표했다.

남북관계발전법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남북 합의서는 체결된 후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비준해 발효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다만 중대한 재정적 부담 또는 입법사항과 관련된 남북 합의서는 국회 비준동의를 거쳐 발효하게 돼 있다.

청와대와 정부는 3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판문점선언에 대한 초당적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으나, 여야 원내대표는 전날 문희상 국회의장 주재 정례회동에서 정상회담 이후 판문점선언 비준동의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정부는 또 이날 국무회의에서 위수령 폐지령안도 심의·의결했다. 위수령은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고 군 병력을 동원,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는 법령이라는 점에서 군사독재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국방부는 지난 4일 위수령 폐지령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위수령은 1950년 3월 27일 육군의 질서 및 군기유지, 군사시설물 보호 목적으로 제정됐으나 최근 30년간 시행 사례가 없는 등 실효성이 작고 상위 근거 법률 부재로 위헌 소지가 많다”고 설명했다.

위수령은 대통령령이어서 국회의 별도 의결 없이 국무회의에서 의결 후 바로 폐기됐다. 1950년 3월 27일 제정된 위수령은 치안 유지에 군 병력을 동원하는 계엄령과 비슷하지만, 국회 동의가 필요 없다는 점에서 계엄령과 다르다. 또 우리 헌정사에서 1979~1980년을 제외하고는 선포 사례가 거의 없는 계엄과 달리 위수령은 몇 차례 발동된 적이 있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1년 10월 대통령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격화되자 위수령이 발동됐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 때도 박 정권은 위수령을 발동, 마산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이에 앞서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안 국회 통과 직후에도 서울 일대 병력이 출동한 적이 있다. 1987년 6·10 항쟁 때도 위수령 발동이 검토됐다. 당시 군 출동 준비령이 하달됐다는 사실이 2010년 공개된 ‘작전명령 제87-4호’ 문건에 나온다. 특전사령관의 반대와 정치적 부담 등으로 위수령은 발동되지 않았고,‘ 6·29선언’으로 이어졌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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