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진흥원 ‘웹진談 9월호’ 발행

[안동] ‘명당’ 극진한 효도인가. 가족 이기주의의 발현인가.

한국국학진흥원이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추석을 앞두고 ‘명당’을 둘러싼 조선시대 선현들의 가문 이야기를 담은 웹진 談(담) 9월호를 발행했다.

11일 한국국학진흥원의 웹진 담에 따르면 ‘명당’에 대한 집착은 조선시대부터 시작됐다. ‘명당’의 기본이 되는 ‘풍수지리’는 본래 도읍지를 정하거나 절터 또는 집터를 잡는 양택(陽宅)이 주류를 이뤘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새 도읍지로 삼고 천도한 근거 역시 풍수지리에 있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를수록 조상의 묏자리를 찾는 ‘음택(陰宅)’ 풍수의 수요가 늘어났다. 조상의 육체가 묻힐 묏자리를 찾고 묘를 관리하는 것은 조상의 영혼을 모셔와 섬기는 제사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졌다. 따라서 좋은 묏자리 즉, 명당을 확보하려는 욕구가 높아지게 됐다.

좋은 묏자리에 조상을 안치하고 잘 관리하는 일은 곧 자손의 도리를 지키고 가문의 권위와 위상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어떤 묏자리를 쓰느냐에 따라 가문의 운명이 달라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좋은 묏자리를 잡는 일은 집안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아버지가 아들의 묏자리를 미리 잡아주는 일도 있었다.

경북 안동의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이 남긴 ‘조성당일기’에 의하면 김택룡은 71세의 나이였던 1617년(광해군 9) 3월 11일 지관인 이자정을 초대했다. 이틀 후 아들들과 함께 좋은 묏자리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지관(地官)이란 풍수지리설에 따라 묏자리나 집터의 길흉을 판단하는 사람으로 지사(地師) 또는 풍수라고도 한다. 미리 점찍어둔 여러 장소를 보여주고 이에 대해 지관의 의견을 들으며 신중하게 아들의 묏자리를 결정했다.

과학적으로 볼 때 좋은 묏자리를 쓰는 일이란 땅에 묻힌 조상의 유해가 자연으로 잘 돌아갈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찾아내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에 ‘가문의 미래’라는 의미가 부여되자 조선 후기에는 묘지를 둘러싼 갈등과 분쟁이 덩달아 많아졌다. 대부분 국유지였던 임야는 좋은 명당을 찾아 묘지를 쓰게 되면서 급속도로 사유화됐다.

사유지가 돼버린 좋은 명당에 자신의 조상 무덤을 쓰고 싶은 욕망은 급기야 남의 땅에 몰래 시신을 묻는 ‘투장(偸葬)’을 감행하는 데에 이르렀다.

남의 땅에 몰래 장사를 지내는 투장으로 인한 법정분쟁도 빈번했는데 이를 산송(山訟)이라고 한다.

땅주인들은 관청을 찾아가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고 소송을 걸게 되지만 민사사건인 산송에 대한 관청의 판결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다시 이장해 가라’는 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관청에서는 이장을 집행하도록 하는 강제력을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투장한 집안이 권력을 이용해 버티는 사례도 허다했다.

산송은 특정 집안 간에 길게는 100년~200년이 넘도록 지루하게 계속되기도 했다. 관아와 지역사족 간의 힘겨루기 장면도 제법 펼쳐져 이를 ‘향쟁(鄕爭)’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웹진 담 8월호의 편집장을 맡은 천준아 작가는 “선현들의 일기 속에 조선후기 가문들의 명당, 투장, 그리고 산송을 둘러싼 창작 소재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역사 콘텐츠가 창작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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