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논설위원
▲ 안재휘논설위원

작금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비관론의 요체는 이렇다. 지난 연초부터 시작된 ‘평화 공세’로 김정은은 시간벌기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게다가 잘하면 ‘종전선언’ 매듭을 풀어 남한을 향한 ‘미군철수’ 요구의 명분을 장착할 수도 있게 됐다. 남북, 북미회담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북한은 ‘핵보유국’ 지위를 확보하여 남한에 사사건건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는 존재로 발돋움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상황이다.

문재인정권과 여당이 꿈꾸고 있는 한반도 평화 구축 시나리오는 크게 다르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남측대표들은 우선 김정은을 철석같이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김정은으로 하여금 북한 군부와 북한주민들에게 “핵을 내려놓자”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자는 심산인 듯하다. 위험하더라도, ‘종전선언’ 같은 선언적 조치들을 양보하면 김정은도 북한내부 정치에서 더욱 장악력을 키울 것이라는 판단일 것이다.

김정은이 북한주민들에게, 특히 군부에게 “거 봐라. 남한도 미국도 내 말을 다 듣지 않느냐”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게 해줘야 북한 비핵화의 선제적 조치들을 추진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계산일 지도 모른다. 한미가 ‘종전선언’조차도 안 해주는 상황에서 핵무기 리스트를 내놓아라, 핵탄두를 몽땅 미국으로 반출하자고 하면 김정은이 군부의 반발이나 북한인민들의 거부감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략적 배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아직껏 ‘북한 비핵화’와 관련하여 어떤 제대로 된 약속의 말도 김정은이나 북측 대표단의 육성으로 들은 바가 없다. 모두가 그들을 만나고 돌아온 우리 측 인사들의 ‘카더라’ 전언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북한의 비핵화 시한은 은근슬쩍 늘어나버렸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4·27정상회담에서 ‘1년 이내’에 비핵화를 하기로 합의했다고 우리는 들었다.

그런데 이번 평양을 다녀온 특사단은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2021년 1월 종료) 내에 비핵화 완료’라는 김정은의 말을 전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비핵화 시한은 지금부터 따져도 2년 4개월 이상으로 늘어난 것이다. ‘종전선언’의 의미는 심각하다. ‘종전선언’을 하고나면 ‘한미연합군사훈련’은 한반도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북한은 “종전해놓고 무슨 짓이냐”고 발끈하면서 모든 것을 뒤엎을 게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아마도 남한의 반미세력들은 곧바로 ‘양키 고 홈’을 노골적으로 외치고 나설 것이다. 그랬을 때, 미국의 여론변화는 최대의 분수령이 될 확률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은 미국 국민들이 훨씬 더 이기적이 됐다는 뚜렷한 증좌다. 북한은 영리하게도 ICBM(대륙간탄도탄) 개발을 접은 척하면서 미국 내 여론을 흔들고 있다. 직접적인 위협도 사라진 마당에, ‘물러가라’고 아우성치는 반미의 나라 대한민국에 굳이 미군을 주둔시킬 실익(實益)이 사라졌다고 판단할 개연성이 없지 않다는 얘기다.

문재인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려면 먼저 김정은과 북한 지도층을 ‘정상(正常)’이라고 믿어야 한다. 정부의 대북정책을 불안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그런 신뢰감을 넉넉히 갖고 있지 못하다. 그 동안 북한이 저질러온 만행들을 살펴보면 그 불신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 사이비 종교국가 형태인 북한이 약속을 신실히 지킨 기억이 별로 없는 게 현실이다.

남북의 문제, 국가안보는 때에 따라서 좀 손해보고 대충 넘어가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상대는 핵미사일을 개발했다고 큰소리를 떵떵 치는 집단이다. 한 번의 실수가 멸망을 부를 수도 있다. 북한 비핵화에 의미 있는 진전이 없는 한 ‘종전선언’은 패착이 될 확률이 높다. 우리는 지금 ‘평화’와 ‘평화 구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구걸로 얻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