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은 안보다 밖이 어두울 때 거울이 된다.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고양이처럼 창의 표면에 비친 자신을 낯설어하며 그 낯섦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자기 자신인지도 모르고 그저 표면일 뿐임에도 기어이 의미를 찾아내고야 만다.
▲ 창은 안보다 밖이 어두울 때 거울이 된다.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고양이처럼 창의 표면에 비친 자신을 낯설어하며 그 낯섦에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자기 자신인지도 모르고 그저 표면일 뿐임에도 기어이 의미를 찾아내고야 만다.

△싸움과 모방

유난히 싸움을 많이 했다. 워낙 시골학교여서 반 학생이 스무 명 남짓이었는데 그 중 남자들 열 명과는 거의 돌아가면서 싸웠다. 아이들이란 원래 영악해서 공부를 잘하거나, 키가 크거나, 터무니없이 잘 생긴 애들에겐 싸움을 걸지 않는 법이다. 나는 공부도 제일 잘 했고, 키도 컸다. 그런데도 매번 싸웠다. 외모가 문제였나?

여튼 거의 모든 싸움에서 이겼지만, 친구들은 매번 나한테 얻어맞고도 싸움을 걸어왔다. 내가 정말 못된 놈이긴 했나보다. 뻔히 맞을 걸 알고도 덤볐으니 말이다. 극구 부인하자면 평소에 나는 다른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고, 인기투표를 해도 그렇게 뒤쳐지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역으로 너무 착해서 친구들이 만만하게 봤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싸울 때는 시끌벅적했다. 싸우는 당사자는 욕을 할 틈도 없이 다급했지만, 중계를 하는 놈, 웃는 놈, 함성을 지르는 놈들. 학교에서의 싸움이라는 게 대개는 십 분 밖에 안 되는 쉬는 시간에 일어났다. 싸움을 하는 나는 심각했겠지만, 친구들은 말리기보다는 진귀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거의 관람 수준이었다. 어떤 녀석들은 권투 경기의 해설자처럼 싸움 중계를 하곤 했다. 장풍이라고 불렀던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이 유행하고부터는 ‘에너지 바’(energy bar)를 칠판에 그려놓고 누가 이기고 있는지를 시각화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대개 수업이 시작될 즈음에 싸움이 시작되었고, 수업이 시작할라치면 구경하는 녀석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말렸다. 선생님이 알게 되면 이래저래 골치가 아팠으니까. 그래서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을 때는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며 수업 끝나고 어디 두고 보자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수업은 지루했고 한줌도 안 되는 분노는 눈녹듯 사라졌다.

무엇보다 싸움을 이어갈 수가 없게 만드는 친구들이 있었다. 이 녀석들은 말이 친구지, 말리지는 않고, 싸움을 하는 우리가 했던 말을 따라하여 모든 상황을 희극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상대도 나도 피식 웃어버렸는데, 웃는 순간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 버리곤 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우식(이정진)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자, 비열한 종원(이종혁)은 우식이 없어지자 우식의 반 아이들을 괴롭힌다. 우식의 반이었던 현수(권상우)와 종원이 복도에서 마주친다. 종원이 “너 지금 꼬놔 봤냐? 인상 펴라”며 비웃듯 말한다. 배알이 꼴린 현수는 종원을 노려보고 종원은 이번엔 진짜 화가 나서 “눈 내리깔어!”라고 말한다.

유하 감독이 대단한 건 다음 장면인데, 종원의 ‘꼬봉’들이 둘의 신경전을 흉내 내며 장난을 치는 장면인데, 유하는 이런 아이들의 심리를 정확히 붙잡아 내고 있다. 한 녀석이 종원처럼 “야 눈깔아! 인상펴라”고 말하면서 상대의 바짓단을 펴려 하면, “너도 뒈지고 싶냐”고 장난스레 너스레를 떤다. 정작 당사자인 현수는 분노를 쌓으며 종원과의 결전을 준비하지만 아이들은 남의 사정 따윈 신경쓰지 않는다.

△미장원과 미장아빔

엄마를 따라 미장원에 가는 것이 좋았다. 그곳엔 항상 수다스럽지만 친절한 아줌마들이 있었다. 친절한 아줌마들은 내게 과도한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또 수다스럽기도 해서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네들에겐 그네들의 수다가 있었으니까. 엄마가 머리를 하는 동안 나는 앉아서 평소에는 사주지 않는 과자를 아귀아귀 먹으며 여전히 얌전히 앉아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래야 다음에 또 엄마를 따라갈 수 있어서였겠지만, 그래도 거울! 거울 때문이었노라고 애써 변명하고 싶다.

그 따위 거울쯤은 우리집에도 있었지만, 미용실의 거울은 유난히 컸고, 그리고 또 맞은편에 그만한 크기의 거울이 있었다. 거울은 서로를 반영하며 내부로 이어졌는데, 거울 속의 거울이 몇 개인지를 몇 번이고 세 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말았다. 내가 더 자세히 보려고 이리저리 움직이면 그 반영은 사라져버렸으니까.

머리를 바글바글 볶는 동안 칭얼대지 않는 아들이 대견스러운 엄마는 안 심심했니, 라고 물어보면, 나는 아니, 라고 짧게만 말했다. 내가 무뚝뚝해서 그랬던 건만은 아닌데, 내가 뭘하고 있었는지 설명을 하려고 해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거울들의 무한한 반영을 지칭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가 것과 없다는 것, 그 답답함을 나는 이때부터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거울과 거울을 마주보게 할 때 무한히 서로를 반영하는 이 이미지를 미장아빔(mise en abyme)이라고 부른다.

미장아빔은 표면들의 반영에 지나지 않지만 그 반영된 모습에는 어떤 깊이가 생긴다. 깊이도, 내면도, 심연도 없지만 이 단순한 표면이 그런 것들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심연 없음, 이것이 우리의 삶인지도 모르겠다.

‘달콤한 인생’에서 서로에게 상처받은 선우(이병헌)와 강 사장(김영철)은 서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봐.” ‘진짜 이유’는 심연에 상응할 것인데, ‘진짜 이유’라니….‘진짜 이유’ 따윈 없다는 것을 모르고, 모르고 그들은 자꾸 ‘진짜 이유’를 알려고 한다. 그들의 삶이 모래 위 누각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들은 끝없이 ‘진짜 이유’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런 길 떠남이, 미용실에서 반영되는 거울의 횟수를 세는 일곱 살 나의 행동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모르고, 모르고 그들은 ‘진짜 이유’를 찾으러 갔다가 진짜 파탄만 안고 끝내는 돌아오지 못한다.

심연은 하나의 가상이자, 물신이며, 심연에의 추구는 파국에 이르는 가장 무서운 질병이다. 이것이 소위 느와르라 불리는 영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미장아빔이 만들어내는 이 무한한 반영 속에서 심연을 쫓거나 좇는 일은 허망하며, 위험하다. 그러니 심연이라는 하나의 가상을 찾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미장아빔을 정지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이러한 표면 작용을 정지시키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우선 반영되는 거울 사이에 정면으로 마주서면 된다. 말이 쉽지 거울의 정면을 보는 일은 얼마나 부담스러운가. 표면의 무한한 반영은 자동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파국은 의지적이라기보다는 자동적이다. 그러니 거울에 맞서는 일보다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파국’에 이르는 것이 더 쉽다.

또 다른 방법은 마주 선 두 개의 거울 중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다. 거울이 세계라면 그것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세계는 사건들 속에서 언제든 파괴될 위험에 직면해 있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의 세계가 다르듯이 말이다. 그렇게 큰 것도 사건이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것 역시 사건이 될 수 있다. 벽에 걸어놓은 거울이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질 수도 있는 법, 세계의 붕괴는 그런 작은 일에서 시작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