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성태서예가·시조시인
▲ 강성태 서예가·시조시인

하늘도 바람에 쓸려 맑고 높푸르러진 가을의 길목, 마음 속 근심만 없다면 뭐든지 해도 좋을 계절이다. 구름밭 쟁기질로 하늘은 더없이 파랗게 깊어가고, 산들바람 간간이 선선하게 불어오니 덥지도 춥지도 않은 때, 가뿐한 걸음으로 산으로 들로 나서보면 어떨까?

길을 가는 데는 걷거나 뛰거나 타거나 날아서 가기도 하지만, 자연의 정취를 제대로 느끼며 가기에는 걷기가 제격이다. 가볍고 편안한 마음으로 들길이나 산길을 걷다 보면 사람, 소리, 빛, 풍경 등 보이고 들리며 향기로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느작거리는 풀잎과 들꽃, 개망초, 쑥부쟁이가 반겨 맞고, 도열하듯 손짓하는 크고 작은 나무들과 주위의 숲, 그 속에 어우러져 음률 곱게 들리는 새와 벌레들의 합창! 처서 무렵의 풀벌레 소리가 얼마나 맑고 또렷했으면 옥양목을 자르는 가위질 소리 같다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을까? 물소리,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걸을 때는 번잡한 마음이 물에 씻겨지고 바람에 풀어져 한결 청아하고 정갈해지는 듯 하다. 바람과 악수하고 길과 인사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된다. 그렇듯 걷는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깨워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을 닮아가는 일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곳곳에는 안전하고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길들이 많이 생겨나 도보 전문 여행객이 무리를 지어 다닐 정도로 걷기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둘레길, 올레길, 자락길, 오솔길, 나들길, 해파랑길 등 걸을수록 흥미진진하고 점입가경인 길들이 지방자치단체의 안목과 특색에 따라 다양하게 개설되었거나 개발되고 있다. 도심에 가까운 길에서는 가족 단위로 삼삼오오 산보하기도 하고, 강변의 둔치길에서는 달리는 자전거와 병행해서 걷기도 하며, 산자락 황토길에서는 맨발로 걷기도 하는 등 서로 얘기하거나 가벼운 운동 삼아 다양하게 걷는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필자의 지인은 ‘걷기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두 발로 걸으며 문화유적을 답사하고 풍광을 즐기는데 심취해있다. 그 분은 몇 년 전 우리나라의 최장 트레일 코스인 동해안 해파랑길을 35일만에 완보했다.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의 770km 거리, 50 구간을 늦은 봄날에 출발해 여름날의 뙤약볕을 거쳐 가을날을 지나 이른 겨울날에 완보했으니, 실로 꾸준함과 인내심의 승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멈추지 않고 중국 시안(西安)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와 홍콩 트레일 코스까지 탐방할 정도로 도보여행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그래서 작년 봄날, 외람되지만 필자가 그 분에게 ‘상보(常步)’ 라는 아호를 지어 드리며 부단한 상행(常行)과 끊임없는 정진(精進)을 기원했다.

또 다른 지인은 세계 3대 트레일로 알려진 미국의 존 뮤어 트레일(JMT)을 배낭 하나 달랑 매고,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계곡에서 미국 본토의 최고봉인 휘트니봉 포털까지의 363km를 15박16일 동안 2천m 이상의 고지대에서 보행과 야영을 일삼으며 완보했으니, 과연 도보족의 도전과 모험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여겨진다.

사람이 걸어 길이 났고 길이 생겨 문명이 발달했다. 사람들은 걸으면서 생각하고 명상하며, 소통과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길을 걸으면서 느림과 여유의 미학을 배우고, 어떤 사람은 걷는 길에서 도(道)를 찾기도 한다.

부지런히 걷는 자에게 지루한 길은 없듯이,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는 것은 삶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부지런히 걷다 보면 자연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인생의 새 길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느러운 이 가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걷기를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