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길수수필가
▲ 강길수수필가

팔월 중순, 들판은 희망이다. 봄에 모내기했던 논에서 초록 벼가 패기 시작한다. 갓 팬 이삭을 살짝 만져본다. 아삭하면서도 보드라운 촉감에 생명과 삶의 비밀이 녹아있다. 우주의 꿈과 벼의 꿈, 농부의 꿈이 하나 되어 손가락에 흘러든다. 먼저 팬 이삭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고향엔 이맘때 한창 논을 맸다. 보리를 베어내고 늦게 모를 심었기 때문이다. 이마에 구슬땀 흘리며 논에 엎드려, 튼실한 벼 포기 사이에 난 잡초를 손으로 뽑아내는 작업이었다. 방학 때 여러 번 논매기를 도운 적이 있다. 까칠한 볏잎 끝이 땀 맺힌 얼굴을 따갑게 찔러대는 것을 요령껏 피하며 잡초 뽑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손 초벌논매기를 마치면 다음부터는 논매는 기계를 썼다. 벼 포기 사이를 두 손으로 기계를 밀며 걸어간다. 이때 도는 두 바퀴 날에 논바닥이 패여 뒤집어지며 잡풀도 뽑히는 쉽고 신기한 작업이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있다. 막 고개 숙이기 시작하는 벼이삭에 어떤 기품(氣品)도 함께 서리는 것 같다. 갓 심은 모, 땅내 맡은 푸른 벼, 막 패는 벼이삭에서는 볼 수 없는 격(格)이다. 쪄내는 모의 앳됨도, 심는 모의 간절함도, 땅내 맡은 벼의 싱그러움도, 모두 이삭 되어 고개 숙이기 위함이 아니던가. 고개 숙인 벼이삭의 품격(品格)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볍씨 뿌려 모 키우고, 때 되어 모심고, 부지런히 가꾸는 농사는 결국 벼이삭이 패 올라 영글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농사짓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벼가 잘 자라도록 적기에 물 대고, 잡초 제거하고, 비료 주는 등 도와줄 뿐이다. 볍씨가 싹트고, 자라나고, 열매 맺는 주체는 바로 벼란 사실이다.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면 볍씨에 있는 유전자의 설계내용에 따라, 벼는 싹터 새로운 한 생을 스스로 산다. 벼이삭 모두가 고개 숙여 익었을 때 벼의 품격 즉, ‘스펙(Specification의 줄임말)’은 완성된다. 사람은 이처럼 익어가는 생명현상에 둘러싸여 살기에 그 소중함을 간과하고 마는 게 아닐까.

요즈음은 ‘스펙’이란 말이 젊은이들의 취업전선에 바이블처럼 통용되는 시대이리라. 스펙을 쌓아야 경쟁자를 재치고, 내가 뽑힌다는 생각이 젊은이들 사이에 팽배해 보인다. 번듯한 직장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직장절벽시대다.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사람의 품성, 품위, 인격 등을 운운 하는 것은 잠꼬대이거나 모자란 사람 또는, 꼰대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사람의 품성이나 인격을 그의 스펙 곧, 학교졸업장이나 자격증, 봉사경력 등으로만 과연 제대로 평가하고 판별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스펙이란 명사의 사전적 뜻은 많지만 규격, 기준, 사양, 명세 등이 산업이나 업무현장에서 주로 쓰인다고 본다. 첫 직장을 실험실에서 시작한 이래 스펙을 참 많이도 다루었다. 필요 검체(檢體)의 품질을 실험하여 그 결과를 스펙과 대조하고 조치를 취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시기를 헤쳐 나가는 동안 원료, 공정, 생산, 출하, 수출품들의 스펙이 올무 되어 마음을 옭아맨 삶을 살아왔다. 생산과 판매와 연구 등에 쓰이는 원료, 제품의 품질을 다루던 스펙이 어찌하여 사람의 격(格)을 따지는 데 쓰이게 된 걸까. 누가, 어디서, 어떻게 스펙이란 말을 사람의 평가 자료로 쓰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을 상품의 질(質)로 보는 마음이 그 안에 스며든 것은 아닐까.

익은 벼가 고개 숙이듯, 인력모집에서도 고개숙인사람 곧, 인격자가 뽑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스펙의 보완책으로 이력서, 자기소개서, 면접, 수습기간, 추천제도, 연수 등 다양한 방안들을 강구하는 듯하다. 사람 뽑는 측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현행 방법 이외에 다른 뾰족한 방안이 당장 생각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스펙을 사람 뽑는 큰 잣대로 쓰는 현상에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의 격 곧, 인격이 원료나 재료, 제품의 질 차원으로 낮추어져 쓰이는 것 같아서다. 딜레마다.

어디, 직장이 필요 없는 유토피아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