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새마을운동가 구술 채록
⑤ 조순란 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 (上)

▲ 조순란 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이 자신이 큰 손으로 불리우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조순란(68) 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은 1949년 12월 1일 김천에서 3남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남편 일 도우며 봉사활동 시작
새마을부녀회 뿐 아니라
동네 부녀회장 지내며
‘큰 손’ 으로 불릴만큼
마을·지역 위해 활발한 활동

김천에서 교직에 몸 담고 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예의범절 교육을 엄하게 받았다. 부친은 당시 대구사범을 나와 17세에 초등학교 교사로 시작해 26세부터 학교장을 역임했다.

평생 교육계에 몸 담은 아버지는 항상 남을 위한 봉사활동도 많이 해 지역에서 가장 큰 어른으로 존경을 받았다. 조 회장과 형제들은 혹여 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될까 품행에 각별히 신경을 많이 썼다.

조 회장은 24세에 결혼한 후 26세 때 남편의 직장 문제로 구미로 이전해 처음으로 새마을운동을 접하게 됐다. 조 회장은 부모님이 평소 지역에서 남을 위한 일을 많이 하신 것을 옆에서 보고 자랐던 터라 봉사는 그에게 당연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봉사활동에 누구보다 열정을 가진 그를 주위사람들은 큰 손 회장이라 부른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퍼주는 손이 크다는 이유다. 조 회장은 구미시새마을부녀회 부회장,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을 거치면서 새마을유공자상, 내무부장관 표창, 새마을중앙회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아버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딸

아버지는 평생을 교육에 몸 담으신 분이셨어요. 항상 책을 가까이하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셨어요. 굳이 나의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존경할만한 그런 분이셨죠. 대구사범도 1등으로 졸업하고, 항상 장학생 자리를 놓치지 않으셨대요.

26세 때 교장이 되셨으니 어려운 점도 많았을텐테 현명하게 잘 풀어내셨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교장이 되셨으니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선생들과 지내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을거 아니에요.

그런데도 어느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한번 안받고 평생을 사셨으니 그것만으로도 존경을 받을 만 한거죠.

우린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형제가 모두 잘 됐어요. 나만 빼고.

나는 고3때 속된 말로 농띠라는 것을 쳐서 대학을 못 갔어요. 형제들 중에 유일하게. 다른 형제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모두 좋은 직장에 들어갔어요. 그래서인지 전 아버지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던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많이 죄송해요.

공부만 그런게 아니에요. 결혼도 마찬가지에요. 결혼 당시 남편의 집안은 정말 많이 가난했어요. 그래도 성실한 남편만 믿고 결혼했어요. 남편은 6형제에 장남이었어요.

결혼 후 내가 모든 시동생을 거둬야했죠. 내가 나이어린 시동생들 목욕탕에서 씻기고 키워 장가 다 보냈어요. 사실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돈이 없어서 아침 저녁은 항상 국수를 먹을 정도였어요.

아버지는 그런 내가 항상 마음에 걸리셨을 거에요. 아버지는 내가 결혼을 했는데 6개월 동안 혼인신고를 못하게 하셨어요. 아마도 내가 그 고생을 참지 못하고 되돌아 올거라 생각하셨던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농사꾼이었으면 아마 바로 친정으로 도망갔을 거에요. 하지만 아버지가 명색이 교육자로 지역에서 존경 받는 어른이신데 차마 그럴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지금부터라도 아버지 기대에 부응하는 딸이 되어야 겠다고.

항상 솔선수범하고, 모범이 되는 사람이 되자. 남들에게 상처주는 일 하지 않고 봉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남편을 따라 구미로 이사

24살 때 결혼해 26살이 되던 해 구미로 오게 됐어요. 남편이 김천에서 체육관을 하고 있었는데, 작은 아버지가 성진고등학교 야간부에 계셨는데 체육선생이 필요하다고 해서 구미로 오게 됐어요.

야간 학교니까 체육선생을 하면서 합기도 영비관을 운영했어요. 한 5년을 그렇게 일하다가 구미시체육회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게 됐죠.

처음에는 구미 원평3동에서 살았어요. 그러다 한우 아파트 15평을 분양받아 살게 됐어요. 그런데 주민들이 나보고 아파트 부녀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거에요.

처음에는 왜 나더러 부녀회장을 맡으라고 하는지 몰랐는데, 남편이 체육회 사무국장이다보니 무슨 행사 때마다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봤었나봐요. 나중에 알았는데 주민들이 부지런해 보여서 추천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당시엔 남편을 위해 일을 많이 했어요. 경기가 있으면 선수들 밥 굶지 말라고 김밥 100인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체육인의 밤 같은 행사가 있으면 새벽부터 장을 봐서 지짐도 굽고 여러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어요.

그러면 행사에 오신 시장님이나 서장님 같은 분들이 사무국장 아내 분 때문에 이런 행사를 잘 치를 수 있다고, 사무국장님은 정말 장가 잘 가신거라고 치켜세워 주셨어요.

그런 식으로 나름 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지역에서 여러 봉사일을 맡게 되었죠. 그래서 새마을운동도 하게 된 거구요.

 

▲ 조 회장이 1995년 새마을핵심지도자 과정을 받고 교육생들과 기념촬영을 한 모습.
▲ 조 회장이 1995년 새마을핵심지도자 과정을 받고 교육생들과 기념촬영을 한 모습.

△큰 손으로 불리게 되다

결혼을 한 뒤부터 봉사하며 살겠다고 마음을 먹어서 그런지 봉사할 수 있는 곳에서 나를 많이 찾았어요.

처음 구미에 와서 원평3동 총무를 하다가 한우아파트에 입주한 뒤에는 부녀회장을 맡았고, 형곡동 2주공에서도 부녀회장을 지냈어요.

구미시새마을부녀회 부회장을 4년동안 하고 부녀회장을 5년동안 맡아했죠.

사람들이 나더러 큰손이라고 부르는데 그건 아마도 내가 손이 커서 그런 것 같아요.

무슨 일을 하던 부족하면 안된다고 생각해 매번 푸짐하게 해서 그런가봐요. 처음 큰손으로 불리우게 된 것은 학교 어머니회 회장을 하고 있던 때였어요.

당시 금오초등학교 어머니회장을 했었는데 교장 선생님이 아버님이랑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학교에 복사기가 없어 학생들 시험 때마다 힘들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당시 600만원을 주고 복사기를 학교에 기증했어요. 선생님들이 많이 고마워 하셨어요.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교육자이셨기 때문에 학생들 가르치는데 불편함이 없어야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거에요.

금오여고 어머니회장을 했을 때에는 학교 전 교실에 커튼과 선풍기를 달아줬어요. 스승의 날이면 음식을 해서 선생님들에게 대접했구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거에요. 이런 일들 때문에 큰손으로 불리운 것 같아요. 하지만 진짜 큰손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시작됐어요.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 10원 동전 모으기 운동 등에서 큰손의 힘이 발휘됐어요.

△금 모으기 운동때 전국 1등 하기도

내가 4대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이었어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동안 부녀회장을 했는데 그 중 가장 어려웠던 일이 바로 금모으기 운동이었어요. 부담감도 컸구요. 나라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으니 새마을회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니 당연히 지도자들이 나서 솔선수범 해야했어요.

정말 이 일은 잘하고 싶었어요. 다행이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셨어요. 역대 전 회장님들도 많이 도와주셨구요.

금모으기 운동이었지만 당시 달러도 받았어요. 내 기억으로는 달러도 많이 받았어요. 금액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금액이 상당히 많았어요. 미안하다면서 그냥 현금으로 주시는 분들도 많았거든요.

그 많은 금과 달러, 현금을 들고 직접 새마을중앙회까지 가서 내야했는데 너무 겁이 나는 거에요. 그래서 이화자 전 회장님과 함께 새마을호를 타고 갔어요.

그런데 어디에 금을 넣고 갈까 고민하다가 양파망에 넣어 갔어요. 사람들 눈에 별로 띄지도 않을 것 같고 해서. 지금 기억에 모은 금의 부피가 큰 양파망에 반 이상 찼었어요. 무게도 무지 무거웠구요. 그래도 어렵게 들고 간 보람은 있었어요. 구미시가 전국에서 1등을 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나라를 위해 무엇이라도 했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해 준 금모으기 운동이었어요. 그때 우리 국민이 이 나라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어요.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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