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기독교 성서에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때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옷을 벗어 길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호했다. 그러나 초라한 죄수가 되어 빌라도 총독 앞에 끌려나온 예수의 모습을 본 군중들은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소리쳤다. 로마의 속국이 되어 도탄에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실망과 분노로 바뀐 까닭이었다.

군중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린 예수가 메시아인 척 속인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 총독도 놓아주고자 했듯이 예수에게는 사실 아무런 죄도 거짓도 없었다. 유대교 랍비와 제사장들이 씌운 죄명은 신성모독과 혹세무민이었지만 군중들이 반대를 하지 않았으면 빌라도는 주저 없이 예수를 석방했을 것이다. 결국 군중들의 오해와 편견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것이었다.

군중이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이기 쉽다. 그런 민중은 곧잘 정치나 이념의 선동에 휩쓸려 폭력과 광기의 집단이 되기도 한다. 히틀러의 나치스가 그랬고 스탈린의 볼셰비키가 그랬다. 희대의 독재자들은 바로 그런 군중의 힘을 동원해서 자신의 야욕을 채우고 독재체제를 공고히 했다. 물론 군중의 힘으로 불의를 타도하고 자유를 쟁취한 역사가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광기와 증오로 살육과 숙청을 자행한 역사가 더 많았다. 특히나 한반도 북쪽의 김일성은 자신의 독재체제를 위해 날조된 선전선동과 악랄한 숙청에 이어 철저한 세뇌로 인민을 모두 꼭두각시로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3대 세습에 걸친 폭정과 우상화 사기에도 대다수 인민들은 감히 의구심을 갖거나 저항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도 의로운 민중 봉기의 역사가 있었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그랬고 기미년 3·1운동이 그랬다. 비록 실패와 좌절로 끝났지만 그 뜻과 정신의 맥은 끊이지 않았다. 그 후로도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민중 시위와 봉기가 있었지만 그 공과에 대해서는 좌우의 평가가 현격하게 엇갈리는 실정이다.

오늘날은 매스컴의 발달로 민중을 선동하고 민의를 결집하는 일이 아주 손쉬워졌다. 무슨 정보든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모바일 정보화 시대에는 군중의 영향력을 무시하고는 경제도 정치도 설 자리가 없다. 누구든지 군중을 설득하고 선동할 능력만 있으면 상당한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파정권의 실정으로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고 간 군중은 그 여세로 좌파정권을 탄생시켰다. 국민의 대다수가 좌측으로 쏠린 현상 앞에서 누구도 섣불리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론을 펼 여지가 없었다. 고공의 지지율을 업고 좌파들의 전횡이 불거지기 시작했지만 그 서슬 퍼런 위세에 언론도 공권력도 한통속이 되거나 알아서 기는 경향이 뚜렷한 현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동안 쌓아온 자유와 민주에 대한 내공이 가볍지만은 않은 나라다. 좌로 쏠린 민심과 정권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갈수록 확산되는 추세다. 국가는 배와 같아서 무게중심이 한쪽으로만 쏠려서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좌편향 민심의 상당수를 우로 돌려놓아야 한다. 좌파정권을 견제할 건강한 우파세력의 결집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무엇보다 좌우가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은 대북정책이다. 북의 정권은 철저한 일인독재체제다. 모든 결정권이 절대존엄이라는 김정은의 손에 달렸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보장하는 체제유지 뿐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체제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몰리지 않는 한 핵을 포기하거나 개혁개방을 할 까닭이 김정은에게는 없는 것이다. 통일의 최우선 목표는 억압받고 굶주리는 북녘동포들을 김일성 일족의 마수에서 해방시키는 데 두어야 한다. 대화든 협상이든 그 원칙을 벗어난 것은 모두 반역이고 사기극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