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스트의 ‘자작나무’에 부쳐

▲ 자작나무에 붙은 얼음에 대해 프로스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비가 온 뒤 개인 겨울 날 아침 / 나뭇가지에 얼음이 잔뜩 쌓여있는 걸 본 일이 있을 것이다. // 바람이 불면 흔들려 딸그락거리고 / 그 얼음 에나멜이 갈라지고 금이 가면서 / 오색찬란하게 빛난다. // 어느새 따뜻한 햇볕은 그것들을 녹여 / 굳어진 눈 위에 수정 비늘처럼 쏟아져 내리게 한다. // 그 부서진 유리더미를 쓸어 치운다면 / 당신은 하늘 속 천정이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 자작나무에 붙은 얼음에 대해 프로스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비가 온 뒤 개인 겨울 날 아침 / 나뭇가지에 얼음이 잔뜩 쌓여있는 걸 본 일이 있을 것이다. // 바람이 불면 흔들려 딸그락거리고 / 그 얼음 에나멜이 갈라지고 금이 가면서 / 오색찬란하게 빛난다. // 어느새 따뜻한 햇볕은 그것들을 녹여 / 굳어진 눈 위에 수정 비늘처럼 쏟아져 내리게 한다. // 그 부서진 유리더미를 쓸어 치운다면 / 당신은 하늘 속 천정이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1. 군 입대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를 다치고 통합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할 수 있는 일은 휠체어를 타고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거나, 책을 읽는 일이었다. 아마 그 때가 고등학교 이후 가장 많이 책을 읽었던 때인 것 같다. 석달 정도 병원에 머물면서 60권 정도의 책을 봤으니, 그 무료함이란 말할 나위 없었다. 그 때 보았던 책이 김연의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였다. 그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으나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비슷한 유의 소설이었던 것 같았다는 느낌이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것은 제목 때문이었는데 ‘자작나무’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자작나무…. 발음하면 할수록 주문이 걸린 듯 자꾸 발음하게 된다. 그럴싸한 제목의 책이 그렇듯 자작나무 배경이 들어가는 장소는 나오지 않는다. 나는 꽤나 오랫동안 궁금하였다.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을까를 막연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병원에 있을때 여름 태풍이 왔다. 내가 있던 병실은 병원의 뒷산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병실에 누워 바람에 내몰리는 나무들을 보며 내 삶과 내 이상을 되새김질하였다.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의 책 표지에 실린 나무의 실루엣을 미루어 볼 때 자작나무와 미루나무는 많이 닮았다. 그래서였을까. 그 많던 나무들 중 가장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미루나무였다. 미루나무는 연록의 연약한 잎을 흔들었는데, 미루나무의 나뭇잎은 뒷면에 흰 가루 같은 것이 묻어있어서 잎을 흔들 때마다 반짝이며 말을 거는 듯했다. 그렇게 건네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말은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잊혀지지 않아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은 미루나무를 자연스레 떠올리곤 했다.

나는 미루나무를 오랫동안 보았는데 프로스트는 자작나무를 오랫동안 보았나 보다. ‘자작나무’라는 시는 자작나무만큼이나 길다. 그 부분은 이렇다.

“나무들은 얼음 무게에 못 이겨 / 말라붙은 고사리에 끝이 닿도록 휘어지지만

부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중략…

얼음 사태가 나무를 휘게 했다는 사실로 / 나는 진실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소를 데리러 나왔던 아이가/ 나무들을 휘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시골구석에 살기 때문에 야구도 못 배우고 / 스스로 만들어낸 장난을 할 뿐이며

여름이나 겨울이나 혼자 노는 어떤 소년 / 아버지가 키우는 나무들 하나씩 타고 오르며

가지가 다 휠 때까지 / 나무들이 모두 축 늘어질 때까지

되풀이 오르내리며 정복하는 소년 / 그리하여 그는 나무에 성급히 기어오르지 않는 법을

그래서 나무를 뿌리째 뽑지 않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 그는 언제나 나무 꼭대기로 기어오를 자세를 취하고

우리가 잔을 찰찰 넘치게 채울 때 그렇듯 / 조심스럽게 기어오른다.

그리고는 몸을 날려, 발이 먼저 닿도록 하면서 / 휙 하고 바람을 가르며 땅으로 뛰어 내린다

나도 한때는 그렇게 자작나무를 휘어잡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 걱정이 많아지고 /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 / 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 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그래서 겨울날 자작나무가 얼음을 털어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나 보다. 프로스트는 자작나무를 사랑해서 구부러진 자작나무를 보며, 한 번도 만난적 없는 소년을 떠올리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소년의 놀이를 상상할 수 있었나 보다. 그리고 자신이 어렸을 적하고 놀았던 그 자작나무 타기를 떠올렸으리라.

프로스트뿐만 아니라 많이 사람들이 하고 놀았을 자작나무 타기는 이제 올곧이 프로스트의 놀이로 귀결되고 자작나무는 올곧이 프로스트의 나무가 되어버렸다. 우리가 진달래를 볼 때면 김소월을 떠올리고 메밀꽃을 볼 때면 이효석을 떠올리듯 자작나무를 볼 때 우리는 프로스트를 생각하게 된다.

2. 1964년 12월에 태어난 김광석의 노래 중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그대 웃음소리’다. 이 노래는 그가 고등학교 때 지은 노래라고 한다. 그런데 김광석은 서른 세 해를 살아 스스로 죽었다. 내 생각에 그가 스스로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반복이 갖는 고통 때문이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때 만든 노래와 그 이후 만든 노래의 스타일에 변화가 없다. 하나의 스타일로 절정에 오른 그는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었고,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이상이 요절하고, 김소월이 죽고, 모차르트가 죽고, 고흐가 죽고 그 모든 것들도 이런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그 절정에 인간은 누구든 머무른다.

그 절정을 누구는 빨리 갖고 누구는 늦게 갖는다. 그래서 사람은 빨리 죽기도 하며 늦게 죽기도 한다. 절정에 이르고 난 후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을 찾지 못하면 그것에서 끝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예술, 좁게는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전 삶을 통해 하나의 형식을 창조하는 듯 하다. 이상의 시와 소설은 하나의 형식을 견지했고, 몰리에르가, 체홉이, 카프카가, 고골리가, 보르헤스가 그러했다. 하나의 형식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절정일 것이다. 그 형식을 발견했을 때 예술가는 가장 행복할 것이나, 그 형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그 형식은 도리어 목을 죄여올 것이다. 이 얼마나 우울한 무서운 일인가. 프로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I‘d like to get away from earth awhile

다시 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어진다. And then come back to it and being over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당찬 프로스트는 절정에 이르렀다가 되돌아오길 바란다. 나 역시 삶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다시 시작하고 싶다. 예순에 사랑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김광석은 죽어버렸고, 아직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나지만, 절정에 이르렀을 때 또 다시 시작할 수 있길 바란다.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몇 개의 유사점 혹은 몇 개의 공식이 있다. 그것은 운명 같은 것일 수도 있으며 법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이 올곧이 내 것이길 갈망한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