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새마을운동가 구술 채록
③ 이헌영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 (下)

▲ 이헌영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이 대통령 훈장증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이헌영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이 대통령 훈장증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나이 어린 10대 여직공들 위해
새마을운동 교육·절약정신 심어줘
공단 내 근로자 90% 이상이 새마을금고 회원
고기잡는 법 가르쳐주는 새마을운동
어려움 딛고 일어서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복지

△새마을운동 교육으로 어린 직공들을 선도하다

구미국가산업단지 내 직물협업단지에서 근무하는 80%이상이 미혼 여성이었어요. 대부분 나이가 어린 10대 여성들이었죠. 그 애들도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힘들었을 거에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당시 동구방직과 코오롱 회사 안에 고등학교가 있었어요. 시내에 한 곳도 있었구요. 초창기에는 대부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어린 애들이고 하니 그런것이었지만 월급도 오르고 하니 하나 둘씩 노는데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어요.

촌에서 자라 이곳에 와서 돈을 제법 벌게되니 씀씀이가 커지기 시작한거죠. 그렇다고 여긴에선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어렵게 번 돈이니 절약하며 아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회사에는 일만 잘 시키면 되지 그런것까지 간섭을 하려 들지 않았구요. 또 어린 여자애들이 돈이 있다는 소문이 나니까 야간에 그 여자들을 꼬시려는 남자들도 생기고. 풍기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어요.

그냥 가만히 둘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도 그런것이 이런 안좋은 소문들이 나기 시작하니까 시골 가족들이 딸을 공장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거에요.

당시에는 유교적인 사상이 강해서 안그래도 딸을 객지로 보내 일을 시키는것을 꺼려하는데 풍기 문제가 생기니까 더욱 안보내려고 했어요. 이런말을 하는게 좀 그렇지만 당시 구미공단에 딸을 보내면 시집은 못보낸다는 소문까지 있었어요.

일단 사람이 있어야 공단이 돌아가니까 시골 면장과 사전에 이야기를 하고,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 구직 설명회를 가졌어요. 그 설명회는 일을 하는 당사자가 아닌 그의 부모들에게 하는 거였죠. 월급은 얼마나 주고, 밥과 기숙사 시설은 어떻고, 올바른 교육을 시키기 위해 이런 교육 등을 한다고 설명했죠. 그리고 회사측의 배려로 그 부모들에게 공장 견학까지 시켜주었어요. 그랬더니 사람을 구하는 일은 좀 해결이 되었어요. 그리고 어린 여성 근로자들을 선도하기 위한 새마을운동 교육을 함께 진행했어요.

일단 풍기 문제는 당시 구미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매일 야간에 순찰활동을 벌였죠. 또 1976년부터는 구미경찰서와 선도교육을 실시했어요.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것이 야간 쉬는 시간에 잡아두고 이런저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교육이었으니 좋아하지 않았죠. 하지만 120여회 정도 반복적으로 하니까 풍기문란 행위는 거의 사라졌어요.

그때 구미경찰서 손승락 보안과장과 같이 일을 했는데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정말 물심양면으로 많은 걸 도와주었지요.

 

▲ 나이어린 여성 직공들이 새마을운동 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
▲ 나이어린 여성 직공들이 새마을운동 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

△절약정신을 심어주다

풍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나서는 사치와 낭비를 추방해야 했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어렵게 번 돈을 함부로 쓰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건전소비생활교육이란 것을 5년동안 300여차례에 걸쳐 진행했어요. 저축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을 주로 교육했어요.

어린 직공들어었지만 미래 설계에 대한 관심을 굉장히 높았어요. 지금보다 미래에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다들 있었으니까요. 저축을 하기 위해선 돈을 맡길 곳이 필요했죠. 그래서 1979년 3월 회원 45명에 출자금 6만5천원으로 새마을금고를 발족했어요.

당시 새마을금고 담당하는 여직원 한명과 둘이서 모든 업무를 봤죠. 힘들었어요. 내 일은 하면서 금융업무도 봐야했으니.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어요. 공단 내 근로자 90% 이상이 새마을금고 회원이 돼 저축을 하게 됐으니까요. 거기에 사업자금, 농사자금, 주택자금, 학자금 등을 필요할 때 언제든지 빌려 쓸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리고 그냥 돈만 모으도록 교육하지 않고, 충효 교육도 같이 했어요. 어렵게 번 돈을 미래의 자신을 위해 쓰는 것도 맞지만 키워 준 부모에게도 보답을 해야한다고 가르쳤어요.

그러다 어느날 한 어린 여직공이 공단에서 3년 정도 일을 했는데 처음으로 고향에 갈 일이 생겼는데 부모님께 어떤 선물을 하면 좋을지 물어보는 거에요. 고향이 강원도 인제라고 했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니 소를 한마리 사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죠. 그래서 큰 소를 하나 선물했나봐요.

거기에다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경로잔치까지 열어 주었더라구요. 그 소식을 듣고 잘했구나 생각했는데 며칠 후에 그 마을 동장이라는 사람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이 여 직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새마을운동 교육으로 저축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있고 있다는 설명을 했나봐요. 편지에는 ‘선생님 이런 험악한 세상에 아이들을 잘 교육시켜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어요. 정말 힘이 나더라구요. 많이 고마웠어요. 그래서 새마을 운동의 좋은 사례라고 생각해 이 여 직공의 이야기에 대한 공적조서와 마을 동장 편지를 함께 제출했어요.

그 후 1년 뒤에 여 직공이 당시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게 됐어요. 그 소식이 또 고향마을에 알려지게 됐구요. 마을에서는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은 사람이 처음이라며 잔치까지 열어주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고 고마워요.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을 맡기까지

구미국가산업단지 내 직물협업단지에서만 새마을 운동 지도자 활동을 했는데 열심히 하다보니 그게 소문이 났나봐요.

한번은 공단동에서 날 찾아와 새마을동협의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거에요. 당시 국가공단 전체를 맡아달라는 거였어요. 그때가 1978년 이었으니까 지금처럼 국가공단이 크진 않았어요.

섬유관련 업체가 대부분이었고, 전자 관련 기업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였어요. 낮에는 나의 고유업무를 봐야하고 저녁에는 새마을교육을 나가야 하고 정말 힘들었지만, 공단동 새마을협의회장을 맡기로 했어요. 앞에서 이야기 한 것들을 공단 전체로 확대해 일을 진행했죠.

그러다 1981년에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을 맡게 됐어요. 사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어요. 아시겠지만 새마을협의회장은 돈을 받고 하는게 아니라 돈을 내고 하는 자리에요.

월급쟁이인 저에게는 사실 부담이었거든요. 그래도 동협의회장들이 회의를 거쳐 추대한 것을 못하겠다고 할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죠. 당시 집에서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새마을교육을 한답시고 집에 붙어있지도 않는 사람이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에서 돈을 내고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을 한다고 하니 좋아할 리가 없었죠.

그래도 집사람이 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했어요. 싫은 기색은 있었지만 말은 하지 않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도 고맙죠. 내가 새마을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말없이 날 도와 준 집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니까요.

 

▲ 이헌영 전 회장의 새마을운동 성공담은 1982년 잡지 새마을 4월호와 5월호에 실리기도 했다.
▲ 이헌영 전 회장의 새마을운동 성공담은 1982년 잡지 새마을 4월호와 5월호에 실리기도 했다.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새마을운동

당시에는 검소하고 절약하고 열심히 일해서 잘사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었다면 지금은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혼자 잘 산다고 되는게 아니거든. 더불어 잘 살아야하는 거지. 내가 좀 잘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베풀줄도 알아야한다는 뜻이에요.

사람은 베풀 줄도 알아야하고 남을 도울 줄도 알아야해요. 도움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 나도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구요. 내가 생각하는 새마을운동은 바로 이런거에요.

가끔 메스컴에서 보면 복지정책이라고 여러가지 나오던데.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사람들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고 생각해요.

가끔 주위에 받는거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어요. 도움을 받는데 익숙해진 사람들. 난 그건 잘못된 거라 생각해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지금이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새마을운동과 그 정신이 가장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

새마을운동의 참모습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내 말에 수긍할 것이라 믿어요. 그 믿음을 가지고 새마을운동과 정신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래요.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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