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순희 수필가
▲ 김순희 수필가

건넌들은 소나기가 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았다. 맑기만 하던 하늘이 산모퉁이를 돌자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강 건너 들에서부터 비릿한 비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소나기는 내가 건너기 어려운 강도 순식간에 건너더니 늘 나보다 한 발짝 앞서 우리 집까지 와버리곤 했다.

바쁜 소나기도 강을 건너야만 마을로 올 수 있기에 들 이름이 건넌들이었다. 건넌들 앞의 강은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집 앞에 작은 강이 흘렀고 그 물을 따라 30분 정도만 떠내려가면 큰 강에 이르렀다. 가락국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란 뜻인 낙동강이 안동에서 합쳐져서 큰 물이 되어 내가 살던 동네를 지나갔다. 지나면서 만나는 지류들을 한 몸으로 받아들여 몸집을 불렸다.

지류라고 해도 강은 강이었다. 한번씩 물이 질 때마다 흐름이 달라지고 흐름에 못 이겨 제방이 깎여 나갔다. 그 강을 우리는 ‘큰물’이라 했다. 큰물이 휘감아 도는 자리는 특히 깊어 내 키를 넘었다. 물의 흐름이 느렸고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바닥이 보였다. 하지만 가장 깊은 곳은 푸른빛이 더 짙어 속을 드러내지 않아 정확한 깊이를 가늠하지 못했다. ‘큰큰물’이라 부르던 그곳에는 용기 있는 동네 오빠들이 들어갈 뿐이었다.

해가 긴 여름은 점심 먹은 배가 다 꺼지도록, 햇살에 살갗이 홀랑 벗겨질 때까지 강에서 나오지 않았다. 튜브 같은 것은 구경도 못한 시골 가시내들은 빈 플라스틱 기름통을 의지해 헤엄을 쳤다. 수영이라는 과목은 들어보지도 못한 탓에 언니들이 하는 모양을 어깨너머로 따라하며 자랐다.

물장구 겨우 치던 여름, 물에 빠져 한껏 물을 먹은 후 한동안 물가에 가는 일이 줄었다. 하지만 오래참지 못했다. 여름 내내 친구들은 큰물에서만 놀았기 때문이다. 헤엄치기가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하얀 차돌을 던져서 찾아오는 놀이를 즐겼다. 너무 깊지 않고, 조막만한 차돌을 던져 넣으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곳에서 놀이를 했다. 서로 겁쟁이가 아니라는 듯 차례가 되면 물속으로 들어가 숨을 참으며 하얀 돌을 찾아 나왔다. 좀 더 깊은 곳으로 던져 넣으며 우리는 마음의 키를 키웠다.

물놀이하기에 조금 스산해지는 아침이 오면 여름방학이 끝나간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배추씨를 뿌려야 한다는 뜻이다. 만날 노는 게 일인 조막만한 손을 가진 손녀였지만 씨 뿌리는 시기엔 할 일이 따로 있는 농촌이었다.

할아버지는 건넌들에다 정성으로 배추 농사를 지었다. 그곳은 거름을 넣지 않아도 농사가 잘되는 찰진 밭이었다. 비가 내릴 적마다 큰물은 누런 황톳물이 넘쳐흘렀다.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가지만 황토는 건넌들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기에 강물이 거름을 넣어주는 역할을 했다.

배추씨를 뿌리는 날, 북을 돋아서 만든 밭고랑을 큰 흙덩이가 없도록 할머니가 잘 다듬었다. 그 뒤를 적당한 간격의 걸음으로 꾹꾹 발자국을 내며 지나갔다. 뒤축에 힘을 주어서 걸어야 했다. 적당한 깊이와 간격을 맞춰야 하기에 이 일은 할아버지가 하셨다. 힘을 주며 디딜 때마다 세로로 갈라진 틈새가 더 벌어졌다. 거기에 흙이 들어가 골이 더 선명해졌다. 마치 오래 쓴 막도장에 붉은인주가 베 있듯 할아버지가 걸어 온 시간들이 스며있는 듯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자 늘 내게 주어질 것 같던 여름방학이 사라졌다. 여름방학이 사라지며 함께 가져간 것은 배추씨를 뿌리기 위해 뒤따라가며 뚫어져라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뒤꿈치이다. 뒤꿈치가 하나뿐인 할아버지도 사라져버렸다.

내게 강에 대한 추억을 가득 안겨주고 개구리헤엄이라도 가르쳐준 것은 큰물이다. 큰물과 큰큰물이 모여 큰 강이 되었다. 들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맑게 흘러가는 넉넉한 강이 되었다. 나와 할아버지의 추억이 담겨 있어서 더 큰 낙동강이 되어 흘러갔다. 건넌들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