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만수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김만수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8일은 무궁화의 날이었다. 무궁화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를 생각해본다.

무궁화(無窮花, Hibiscus syriacus)는 아욱과의 낙엽관목으로, 대한민국 법령으로 제정되지 않은 ‘통념의 국화(國花)’이다.

무궁화는 꽃으로도 으뜸임을 옛날 중국에서는 군자의 기상을 지닌 꽃이라 하여 예찬했고, 서양에서도 그들 이상의 꽃인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라 하여 무척 사랑한다.

꽃은 7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개화하며 새로 자란 가지의 잎겨드랑이에서 한 송이씩 핀다. 대부분의 품종은 이른 새벽에 꽃이 새로 피었다가 오후에는 오므라들기 시작하고 해질 무렵에는 꽃이 떨어지기를 반복하지만 반겹꽃이나 겹꽃 계통에 속하는 일부 품종의 경우 2~3일간 피어있기도 한다. 꽃의 모양은 대부분 종 모양으로 생겼으며 꽃자루는 짧은 편이며, 꽃 색깔은 붉은색, 분홍색, 연분홍색, 보라색, 자주색, 파란색, 흰색 등 다양하다.

특히 무궁화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단 둘레에 많이 심어져 신성시되기도 했다. 또한 중국 선진(先秦)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해경’에서 언급된 ‘군자국’(君子國)에 관한 설명에 따르면, 무궁화는 ‘아침에 꽃이 피고 저녁에 꽃이 지는 훈화(君子國在其北…有薰(菫)花草 朝生夕死)’로 소개하고 있으며, 신라를 ‘무궁화가 피고 지는 군자의 나라’로 지칭하였다. 그리고 최치원이 당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 ‘근화향’(槿花之鄕, ‘무궁화의 나라’라는 뜻)을 언급하였고, 구당서 신라전(新羅傳)에도 신라를 ‘근화향’(槿花鄕)으로 소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AD 897년 신라 효공왕 원년, 당나라 광종에게 보낸 국서에 신라를 ‘근화향(槿花鄕)’이라고 지칭하였다. 이 국서를 초안한 사람은 대문장가 최치원이고 ‘최문창후문집(崔文昌候文集)’ 초안에 수록되어 있으며, 화랑의 원조인 국자랑은 무궁화를 머리에 꽂고 다녔다.

고려의 예종도 고려를 ‘근화향’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훈화(薰華, 향기 나는 꽃)’로 표현했다. 또한 장원급제자 머리에 꽂은 꽃도 무궁화였고, 혼례 때 입는 활옷에 무궁화 수를 놓는 것은 다산과 풍요를 의미했다. ‘무궁화’로 불린 것은 조선시대 이후로, 그 이전에는 ‘목근(木槿)’ 또는 ‘근화(槿花)’, ‘순(舜)’ 등으로 불렀다.

독립문 건축기념 행사 때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무궁화’는 애국가의 후렴구에 등장할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꽃으로 관습상 국화(國花)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철도 중에서 한때 가장 많이 편성되어 전국민의 꿈과 애환을 싣고 달렸던 열차도 ‘무궁화호’이며, 국가가 수여하는 훈장과 통신 위성에도 무궁화의 이름이 붙여졌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정한 것도 국회나 정부가 아닌 민간단체이고,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일본의 국화인 ‘벚꽃(사쿠라, sakura)’이 이미 오래 전 우리의 도로변을 점령했다. 지자체들이 앞 다투어 ‘벚꽃 축제’ 경쟁을 벌이다 보니 벚꽃관련 행사는 해마다 늘어나고 가로수가 온통 벚꽃나무로 교체되는데 비해 무궁화 관련 행사나 80년대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정원수로 흔히 접할 수 있었던 무궁화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젠 관공서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다.

수 천 년동안 민족의 꽃으로 불린 무궁화가 그 어떤 꽃보다 홀대가 심각한 실정이다. 정부에서조차 무궁화에 대한 관리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러다간 정말이지 애국가 후렴구에서조차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무궁화 한그루 없는 삼천리 강산….”으로 바꿔 불러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무궁화가 국민에게 친숙한 나라꽃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의 시급한 대책 마련을 강력히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