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유광의 항척헌지에 대해

▲ 비파나무는 우리나라로 치면 살구에 가깝다. 그 맛은 살구처럼 새콤하진 않고 달콤한 쪽에 가깝다고 한다. 추억을 맛으로 치자면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다. 추억은 모든 면에서 새콤달콤하다.
▲ 비파나무는 우리나라로 치면 살구에 가깝다. 그 맛은 살구처럼 새콤하진 않고 달콤한 쪽에 가깝다고 한다. 추억을 맛으로 치자면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다. 추억은 모든 면에서 새콤달콤하다.

귀유광(1506∼1571)은 명나라 때 사람이다. 과거에 무려 여덟 번이나 떨어졌고 예순에 비로소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전까지 사숙을 열어 시와 도를 논하였는데, 학생만도 1천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유명한 글로는 ‘선비사략’과 ‘사자정기’ 등이 있다. 과거를 회상하거나 가까웠던 사람들을 애도하는 산문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글들은 사실성을 바탕으로 풍부한 감정을 드러낸다.

‘항척헌지’는 귀유광이 기거했던 ‘항척헌’이라는 자신의 쪽방을 소재로 하고 있다. 그 쪽방의 경치,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그의 아내에 대한 추억들로 가득한데, 그 추억은 애정과 눈물들과 더불어 켜켜이 쌓여 있다. 먼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그의 예민한 감수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집에는 늙은 할멈이 있었는데, 일찍이 여기에서 살았다. 할멈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시녀였다. 두 대에 걸쳐 유모를 하고 있었기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녀를 각별히 대우하였다. 집 서쪽은 여자들이 기거하는 규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할멈은 어머니가 머물렀던 곳을 일일이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였다.

“도련님의 어머니가 바로 여기에 서 계셨지요.”

할멈은 또,

“도련님의 누이가 제게 안기어 앙앙 울면 도련님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며 ‘아가, 추우냐? 배가 고프냐?’ 하셨답니다. 그러면 제가 문 뒤에서 답을 올렸지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울면, 할멈이 따라 울었다.”

귀유광은 어머니를 일찍 여위었나 보다. ‘할멈’이 들려주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기실 아무것도 아니다. 어머니가 잠깐 들러 ‘아가 추우냐, 배가 고프냐?’라고 물은 것이 다. 그럼에도 귀유광은 서럽게 울었을 것이다. 감성이 풍부한 귀유광은 이 단순한 대사 속에서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금세 알았던 것이리라. 어머니를 일찍 여윈 귀유광은,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슬펐을 것이고, 그런 그를 내 마음 역시도 짠하게 저려 온다.

이것은 아내와의 추억에 관한 것이다.

“(내가 뜻을 품고 항척헌에서 지낸 지) 다섯 해 뒤에 내 아내가 시집왔다. 때로 방안으로 와 내게 옛 일을 묻거나 혹 책상에 기대어 글을 읽었다. 내 아내가 친정으로 가면 여러 여동생들이 ‘듣자니 언니 집에는 문간방이 있다고 하던데, 또 문간방은 뭐예요?’라고 물었던 것을 얘기해 주었다. 그 후 6년이 지나 내 아내는 죽고, 집은 무너졌지만 수리하지 않았다.”

이 짧은 이야기 속에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아내가 비스듬히 누워 애교 섞인 목소리로 옛일을 물으면 귀유광은 추억 속에 잠기어 느릿느릿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했던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얼마나 슬펐을까. 왜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은 그토록 일찍 죽어야 했던 것일까.

이렇게 보자면 항척헌은 자신보다 먼저 죽은 어머니, 할머니, 아내에 대한 애도인지도 모른다. 또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 대한 조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슬픔은 수백 년이 지나도 소진되지 않고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귀유광이 추억하는 것은, 잊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매우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 언제든 잊어버려도 그만인 것들이다. 여기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 언제든 잊어버려도 그만인 사소한 것들을 기억한다면, 역설적으로 그는 이 항척헌과 관련된 혹은 그의 어머니, 할머니, 아내와 관련된 얼마나 더 많은 기억들까지도 잊지 않고 있단 말인가. 보잘 것 없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그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면, 그 너머에는 더 많은 추억들이 아로 새겨 있을 것이다.

2.

내가 이 글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문장과 관계되어 있다.

“깊은 밤중에 밝은 달이 담장에 반쯤 걸리면 계수나무가 알록달록 그림자를 만든다. 바람이 그 그림자를 옮겨놓을 때 살랑거리는 소리가 좋았다(三五之夜, 明月半牆, 桂影斑駁, 風移影動, 珊珊可愛。).”

여기에서 특히 좋아하는 부분은 ‘바람이 그림자를 흔들다(風移影動)’이다. 그림자는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빛이 투과하지 못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자는 물질임에도 비물질에 가까워서 우리가 잡으려고 애써도 잡을 수 없다. 바람이 그림자를 움직일 수는 없다. 사실 이 말은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흔들었고, 그러자 그림자가 움직였다는 말이다. ‘풍이영동’이라는 말은 나뭇잎이라는 매개를 지워버림으로써 인과법칙을 내파하여 바람은 그림자로 직결시킴으로써 우리의 인식 너머로 솟구친다.

바로 여기에 문학적 표현이 있고, 문학의 정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우리의 이성과 논리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갈 수 있다. 문학은 우리의 이성 너머로 더 너머로 무수히 도약한다. 하여 문학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늘 인식 너머를 지향하니까.

▲ 공강일<bR>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3.

바람이 그림자를 흔들다, 라는 말을 수학공식처럼 사용하여 ‘항척헌지’ 전체를 해석해볼 수 있다. 우선 바람의 자리에 항척헌을 대입한다. 그런 후 그림자에 해당하는 것을 찾으면 된다. 이것을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바람 : 그림자=항척헌 : X’

항척헌을 추억함으로써 떠올린 것은 그 공간보다는 어머니, 아내, 할머니 등등 주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항척헌을 통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라고 한다면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의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림자까지를 흔드는 건너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항척헌을 통해 떠올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항척헌을 둘러싼 사람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 그런 것들을 상실한 귀유광일 것이다.

이 글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후로 내가 밖에 많이 있어서 항상 거처하지 못했다. 지금 뜰에는 내 아내가 죽던 해에 손수 심은 비파나무가 자라고 있을 것이다. 지금 무성하게 우뚝서서 그곳을 덮고 있으리라.”

귀유광은 자신의 외로움과 쓸쓸함의 깊이를 저 비파나무로, 그 외로움과 쓸쓸함의 두께를 비파나무 잎의 무성함으로 옮겨 놓고 있다.

아, 어찌 그의 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