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살며생각하며 (25)

슬프다. 이런 탄식으로 시작하는 글을 써야 하는 것을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것 같았는데 불쑥불쑥 솟아나는 아픔이 있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영화 속 슬픈 장면들 같은 것.

다시는, 세상에 나서, 국민이라는 무거운 레떼르를, 번호표를 부여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달라고 아우성치며, 울고불며,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아 몇날 몇일을 기약없이 헤매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자식 잃은 부모들이 왜 내 자식이 그렇게 바닷물 속에 수장되어야 했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 해서도 안된다는 듯이 ‘종주먹질’을 당하고, 신문 방송이 나서서, 슬픈 부모들을 돈이나 탐내는 이들로 몰아부치고, 진실을 밝히고 싶은 사람들을 향해 이념 전쟁을 벌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된다. 누가 왜 죽었는지, 정말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스스로 죽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오로지 그가 죽어버렸다는 사실 하나만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향불을 피우고 누구 연출 누구 각색인지조차 모른 채 시나리오의 이름없는 엑스트라들처럼 할당된 연기나 벌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또 없어야 한다. 국민이라는 그 무겁고 어려운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언제라도 총칼에, 탱크나 군홧발에 짓밟히는 일들은, 딱딱하고 날카롭고 뜨거운 것들에 얇은 살갗이 터지고 이마에 피가 흐르는 학살 같은 역사 따위는, 죄없는 이들, 잘못된 것들을 잘못 되었다 하는 이들,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발악한 이들이 붉은 칠을 당한 채 묶이고 끌려가고 갇히는 일들은 없어야 한다.

세상에 날 때 사람들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송보송한 발가벗은 갓난아기로 세상에 나, 처음 만난 엄마 뱃속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 놀라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아빠는 차라리 그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말았어야 했다. 출생 신고를 어디에 할지 고민했어야 한다. 사람의 생명을 여기보다 더 소중히 아끼고 사랑해 주는 곳, 여기보다 목숨 값이 훨씬 더 비싼 곳, 사람이 날 때와 돌아갈 때를 그 몸서리치는 기쁨과 슬픔답게 챙겨줄 수 있는 곳, 이유 모르게 죽지 않고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지고, 마음 놓고 울면서 보내드릴 수 있는 곳. 그런 세상의 국민으로 ‘내’ 자식을 등록할 수는 없었을까?

한밤에 유튜브로 “6411번 버스를 아시나요?”라는 연설을 들으며 그는 왜 그렇게 되었어야 했나 생각한다. 6411번 버스는 새벽 네 시에 잠에서 깨어야 하는 사람들의 버스, 이 버스는 한강을 가로질러 북쪽에서 남쪽으로 간다.

이 버스를 늘 타는 사람들을 사랑하던 사람은 지금 세상에 없다. 무서운 것은 세상이 바뀌지 않은 것 같다는 이 느낌이다. 섬뜩하고 음습하고 누군가 처분되어야 일이 일단락되고 마는 것 같은 이 느낌. 아주 많이 겪어 다시는 겪어보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과거의 장력.

이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내가 잘못된 걸까? 마음껏 슬퍼할 수도 없는 이 공포와 숨막힘, 두근거림은 나이보다 너무 빨리 노쇠해 버린 약한 자의 만성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인 것일까?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