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생자필멸(生者必滅)이란 말이 있다. 살아있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는 뜻이다. 인생은 덧없고 짧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 뜻은 결코 짧을 수가 없다.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묘비명이다. 원래 묘비명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유래했고 이행시(二行詩) 형태를 원형으로 삼았다. 서양에서의 묘비명은 짧은 경구나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가장 흔한 묘비명은 인생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교훈적인 문구 ‘메멘토 모리(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이다. 심지어 어떤 작가는 자기가 쓴 작품 속의 주인공을 죽게 만들고서는 그들을 위한 묘비명도 써주었는데, 세르반테스의 명작 ‘돈키호테’는 파란만장한 여정 끝에 등장인물들이 세상을 떠나자 소설의 맨 마지막을 그들을 위한 묘비명 시로 장식했다.

서양의 경우 꽤 유명한 자찬 묘비명은 ‘인간과 초인’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버나드 쇼(1856~1950)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지었다. 묘비명이 반드시 사람에게만 쓰인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한 예는 바이런이 자신의 개 ‘보우썬’에게 바친 묘비명이다. 그 내용은, ‘이 곳에 묻힌 개는 아름다움을 가졌으되 허영심이 없고/힘을 가졌으되 거만하지 않으며/용기를 가졌으나 잔인하지 않고/인간의 모든 덕목을 가졌으되 그 악덕은 갖지 않았다’이다. 이 묘비명을 읽으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설쳐대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기만 하다.

스피노자는 ‘신에 취한 사람,’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 토머스 모어는 ‘고결한 양심, 불멸의 영혼’이라 새겼다. 중국의 도연명은 스스로 만사(挽詞)를 짓고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오류선생전’을 지었으며, 백낙천은 ‘취음선생전’을 지었다. 일본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잘못 쓴 원고를 찢는데 일생을 소비한 사내가 여기 잠들다’라는 자화상적인 묘비명을 선사했다.

우리의 경우는, 정몽주는 ‘不事二君(두 임금은 섬길 수 없다).’ 유골 대신 이상을 묻은 광해군조의 허균은 ‘閒見古人書(한가하면 옛사람의 책을 보라).’ 이황은 ‘근심 가운데에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가운데에 근심이 있었네. 조화를 타고 일생을 마치니 다시 또 무엇을 구하리오?’라고 스스로 지어 새겼다.

선조 때 문인 성혼(1535∼1598)은 ‘평소 명예를 훔쳐 나라의 은혜를 저버렸기에, 신하로서 국가의 은혜를 저버린 죄가 크므로 시신에 삼베옷을 입히고 종이 이불로 염습하여 달구지에 싣고 고향에 돌아가 묻어달라’고 지었다. 인생의 성취를 자랑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면서 후손들이 장황한 장례를 치르지 않도록 미리 경계한 것이다. 세 번이나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됐지만 모두 사양했던 성혼의 초탈한 인격이 묘지에 그대로 묻어나 있다.

얼마 전 타계하신 김종필 전 총리도 스스로 비문을 지었다. 시경 300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무사(思無邪)이다. 이 사무사를 평생 도리로 삼고 맹자의 무항산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나라 다스림의 근본으로 삼고, 논어의 遽伯玉(나이 50세에 49년의 잘못을 깨닫는다) 즉, 본인은 나이 90에 89년의 잘못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백의 시, 산중문답의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인용하여 마음의 한가로움 속에 평생을 함께한 내조의 덕을 베푼 부인에 대한 애틋함을 비문에 새겼다.

동서와 고금을 넘어 자찬 묘비명을 남긴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통찰과 관조가 놀랍다. 지금의 위정자들이 어떤 내용의 비문을 스스로 지어 남길지 사뭇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