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새마을운동가 구술 채록
① 배병희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上)

▲ 배병희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 회장이 비산동 강변 나룻터 축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배병희(60)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은 1958년 부산에서 4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산 동희공고에서 전기과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고향인 부산에서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 작은 형님이 있는 구미로 왔다. 전기와 관련된 자격증이 있어 당시 대우전자에 입사해 처음 새마을운동을 접했다.

직장새마을에서 받은 새마을 교육으로 새마을운동에 눈을 뜨고 난 뒤 2001년부터 비산동새마을협의회장을 8년간 했다. 그 기간동안 구미시 새마을회 총무를 겸직하기도 했다.

비록 구미시 새마을회장이나 경북도 새마을회장직을 맡은 적은 없지만,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지역에서는 가장 열심히 새마을운동을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했던 인물로 꼽힌다. 2017년 1월까지 구미시 새마을 후원회장을 맡아오다 지금은 봉사활동만 하고 있다.

대우전자서 새마을운동 처음 접해
2001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 맡아
낙후된 마을 개선, 동네축제도 열어

△직장을 찾아 구미로

고향은 부산이에요. 부산 사상구에서 살았어요. 내 기억으로는 그 곳은 도시도 아니고 촌구석도 아닌 그런 곳이었어요. 도시와 촌이 반반씩 공존했다고 할 수 있죠. 우리집은 평범한 가정이었어요.

전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어요. 어릴적부터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공부는 솔직히 못했어요. 그래서 공고로 진학해 전기과를 전공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은 대학에 갔지만 전 바로 공군에 입대했어요. 남들보다 일찍 군대를 다녀왔죠. 그래도 군대를 일찍 다녀오니 자신감 하나는 충만해 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겁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거에요. 제대하고 나서 직장을 가지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당시 부산에서는 직장을 구하기는 힘들었어요. 하지만 구미는 산업화가 시작되고 있었기에 좋은 일자리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구미로 갔어요.

그때가 내가 제대한 직후였으니 1980년도였어요. 작은 형님이 먼저 구미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형님을 보니 구미에서 직장을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엔 형님 공장에서 일을 했었어요.

전기와 관련된 일을 했죠. 대략 3년정도 근무했어요. 그러던 중 아버님이 젊은 나이에 대기업에서 일을 해야되지 않겠나라고 하셔서 대우전자에 입사신청을 했어요. 운이 좋아서인지 바로 대우전자라는 대기업에 취업을 하게 됐어요.

그때가 1984년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새마을운동이란 걸 알게 됐어요.

△난생 처음 학생장을 맡다

1984년 대우전자에 입사를 했는데 직장새마을회에 가입을 하라고 하더라구요. 전 처음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어리기도 했었고 부산 출신이라 구미에서만큼 새마을운동을 접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일단 직장새마을회에 들어가니까 4박5일 동안 새마을연수를 보내더군요. 우리 회사에서는 나를 포함해 20명이 연수를 다녀왔어요.

연수를 받은 사람들은 우리 회사 사람들을 포함해 대략 100여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교육은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는 회사에서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새마을정신으로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새마을지도자라는 분들도 나오셔서 성공담을 들려주시기도 했구요. 연수를 받으면서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했어요. 사실 당시 젊은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죠.

어린 나이에 돈을 버니 자칫 돈을 함부로 쓰거나 나태해 질 수도 있었는데 처음부터 그런 교육을 받으니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겠다는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으니까요.

몰랐던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니 수업이 너무 재밌는거에요. 학창시절 그렇게 수업 듣기가 싫었는데 그 곳에선 내가 열심히 하는 게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였었나봐요. 학창 시절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학생장을 나에게 맡기더라구요.

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100여 명을 대표하는 학생장을 맡았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에 최선을 다했어요. 난생 처음 장을 해본 것이었으니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남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 짧은 4박5일간의 학생장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에요.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알게 됐으니까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가르침을 준 학생장 시절이에요.

△동네부터 깨끗하게

대우전자에 입사한지 10년만에 개인사업을 하고 싶어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어요. 회사를 그만 두기 전까지 직장새마을회에서의 활동은 충실하게 했어요. 하지만 직장새마을회의 일이란게 그리 많지가 않았어요. 물론 당시에는 회사에도 구미시청처럼 새마을과가 있었어요. 하지만 일이라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근해 공장 내부를 깨끗하게 청소한다던지 인근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한다던지 그런 일이 대부분이었죠.

그러다 퇴직 후 개인사업을 하다가 내가 살던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을 맡게 됐어요. 그때가 2001년도 였어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8년간 했으니까. 비산동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대이다보니 여름에는 모기도 많고, 마을길은 항상 진흙탕이었어요. 또 6.25 당시 격전지이기도해서 많이 낙후가 되어있었죠.

그래도 산업화로 인해 공단이 들어서니까 주말이면 공장 근로자들이 데이트하러도 많이 오고, 낚시를 하러도 왔었어요. 지금은 낚시를 못하지만 당시엔 낚시를 할 수 있었거든요. 주말에 사람들이 북적이니까 동네에 활기가 생기더라구요. 유명한 매운탕집도 생기구요.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 시작하니 문제점들도 생기기 시작했어요.

동네가 원래 지저분하다보니 오는 사람들도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기 일쑤였고, 당시 차가 많은 시절이 아니었음에도 아무 곳에나 주차하는 차량들로 민원이 생기기 시작한 거에요. 그래서 새마을협의회가 나섰죠. 당시 동네에 저를 비롯해 젊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한마디로 힘좋은 청년들이 많았다는 거죠.

젊은 사람들이 많으니 항상 의욕도 넘치고, 무슨 일이든 혈기왕성하게 했어요. 우선 동네부터 깨끗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시에서 조금 지원을 받아 동네 골목길 정비 등을 시작했죠. 매일 새벽 청소도 하고, 주말에는 강변에서 차량통제도 하구요. 동네가 깨끗해지고 교통정리도 되니까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동네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고 동네를 정비하더라구요. 동네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많은 보람을 느꼈어요.

▲ 배병희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은 구미시나 경북도 협의회장직을 맡은 적은 없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새마을운동에 전념한 사람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받은 감사패와 표창패가 자긍심이라고 배 회장은 말한다. /김락현기자
▲ 배병희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은 구미시나 경북도 협의회장직을 맡은 적은 없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새마을운동에 전념한 사람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받은 감사패와 표창패가 자긍심이라고 배 회장은 말한다. /김락현기자

△동네 특색을 축제로

주말이면 사람들이 많이 찾기는 했지만 그걸로 만족하기는 뭔가 부족했었어요. 우리 동네만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를 했어요. 비산동만의 특색이 무엇인지 고민하다보니 나룻터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매년 비산동 강변 나룻터 축제를 열기로 했어요.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반응이 좋으니 시에서도 지원을 해주더군요. 축제를 한번 하기 위해선 주민들이 10여 일 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야했어요. 아무 대가도 없이 일만 하는 게 마음이 걸려 축제기간에는 동네주민들에게는 공짜로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했어요.

어차피 동네주민들이 하는 축제니까 그 정도의 혜택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동네주민들도 좋아했고, 더 열심히 축제를 준비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더군요. 또 지역특산물을 전시하면서 팔 수 있도록 했어요. 당시 축제를 보러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공장 근로자들이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직장을 찾아 구미에 온 사람들었으니 구미 특산물을 알리기도 하고 판매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이것도 반응이 엄청 좋았어요.

나룻터 축제에서 특산물 판매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정기적인 바자회를 열기로 하고, 2년에 한번 바자회도 열었어요. 비산동새마을협의회가 주축이 되긴 했지만, 비산동의 다른 단체에서도 많은 지원과 참여를 했었어요. 특히 새마을부녀회가 만든 국밥이 제일 인기가 있었어요. 구미시청 직원들도 점심 때 일부러 국밥 먹으러 오기도 했으니까요. 축제는 축제였어요. 동네주민들에게는 축제 기간뿐만 아니라 준비하는 시간 모두 축제였던 것 같아요.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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