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시리즈 포항 지진 그 이후
① 잊혀진 지진

▲ 11·15 강진 발생 8개월여가 지났지만, 정부와 정치권의 무관심 속에 제대로 된 지원책 마련이 지지부진하면서 지진피해 지역의 주민과 이재민의 상처만 더욱 커지고 있다. 사진은 6일 오후 흥해읍 한미장관맨션 주민들이 게시한 현수막.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19세기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가 16년간 연구한 ‘망각곡선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망각은 학습 후 10분이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1시간 뒤에는 50%, 하루 뒤에는 70%, 한 달 뒤에는 80%를 망각하게 된다. 아무리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우리 주변에는 생존을 위협하는 변수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매년 교통사고, 폭행, 테러 등에서부터 지진, 태풍, 화산폭발과 같은 자연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사고가 현실세계에서 발생하고, 이 때문에 많은 소중한 생명이 사라져간다. 사건·사고가 발생한 이후에는 늘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잠시동안일 뿐, 이내 ‘망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건·사고에 대한 기억은 잊혀진다.

포항지진이 그렇다. 포항시민은 물론, 전 국민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대형지진이 발생한 지 불과 9개월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게 지진은 수년, 수십년 전의 희미한 기억의 한 조각 정도에 불과하다.

쉽게 잊혀진 만큼 후속조치도 흐지부지되는 모양새다.

수백가구가 보금자리를 잃었고, 일부는 현재까지도 이재민 생활을 하고 있지만 수습의 책임은 오롯이 포항시와 피해주민들에게만 전가되고 있다.

정치권과 중앙정부 인사들이 지진발생 직후 수없이 쏟아낸 지원방안들은 대부분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지난해 11월15일 발생 9개월째
피해지역 일부 아직도 ‘이재민 생활’
끊이지 않던 정치권 인사들 발길 ‘뚝’

갈라지고 무너진 위험천만 속 수습은
포항시·피해주민들 책임만으로 ‘답답’

포항, 특별재난지역 선포 후…
정부·정치권 지원·협력 약속마저 무색
입법안 13건 중 ‘도시재생’ 법안만 통과

주택 전파 관련 복구비 지원 확대 등
‘재난·안전관리 기본법’ 등 개정안 시급
市 “피해 지역민들에 관심과 희망을”

◇그 많던 정치권 인사들 발걸음 뚝

포항지진이 발생한 다음날인 지난해 11월 16일부터 정치권과 중앙정부의 수많은 인사들이 피해현장을 찾았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조속한 피해복구와 재정적 지원 등을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더불어민주당 우원식 당시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재난지원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특별지원금과 교부세 등을 지원하기 위해 당정이 협의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당시 대표는 당 차원의 ‘포항지진특별지원대책팀’을 긴급 구성해 피해실태 조사를 비롯해 피해복구, 이재민 지원 등 분야별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당시 대표도 지진관련 예산문제를 초당적 협력을 통해 진행해 주민피해를 최소화하겠다고 약속했고, 바른정당 유승민 당시 대표도 포항시 재정에 도움을 줘서 피해복구가 빨리 이뤄지도록 돕겠다고 다짐했다.

정부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포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8개월여가 지난 현재, 이들의 약속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

피해주민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하는 혜택은 정부가 관련법에 근거해 전달한 지진피해 주택복구 지원금(최대 900만원)과 국민들이 직접 모금한 지진피해 성금에 따른 의연금(최대 500만원)을 제외하면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태산동명 서일필(泰山動鳴鼠一匹)이란 말처럼 계획과 약속은 거창했지만 결과는 보잘 것 없는게 현실이 되고 있다.

먼저 국회 재난지원특별위원회는 지진이 발생한지 9일 뒤인 지난해 11월 24일 재난안전대책특별위원회라는 명칭으로 출범했다.

더불어민주당 변재일(충북 청주 청원) 의원을 위원장으로 총 18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포항지진, 제천화재 등 재난안전에 대한 국민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입법, 예산 등 국회 차원의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지난 5월 29일까지 약 6개월간 활동한 재난특위는 21개 기관의 정부부처를 대상으로 4차례의 업무보고, 1차례의 공청회 등을 거쳐 7건의 입법안을 공동발의했으나 현재까지 단 1건도 소관 상임위 상정조차 하지 못했다.

자유한국당이 자체적으로 구성키로 한 포항지진특별지원대책팀도 2명의 포항지역 국회의원을 제외하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뚜렷한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원과 협력을 약속한 나머지 정당들도 지진복구보다는 정쟁에 집중했고 포항을 향한 발길과 관심을 뚝 끊어버렸다.

정부가 포항지진이 발생한지 5일만에 선포한 특별재난지역도 지자체 재정에는 일부 도움을 줬지만 주민들이 피부에 와닿는 지원책은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피해지역 주민들의 불만만 커지고 있다.

포항지진 최대 피해지역인 흥해에 거주하는 주민 김모(61)씨는 “처음에 지진이 발생하고 나서는 너나할 것 없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이 떠들더니 지금은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며 “애초에 약속이나 하지 않았으면 상실감이 덜할텐데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하니 우롱당한 기분”이라고 하소연했다.

▲ 포항 지진 발생 다음날인 16일 기둥이 대파된 북구 장량동 필로티 구조의 원룸에 강철기둥으로 임시 보강작업이 되어 있다.  /경북매일DB
▲ 포항 지진 발생 다음날인 16일 기둥이 대파된 북구 장량동 필로티 구조의 원룸에 강철기둥으로 임시 보강작업이 되어 있다. /경북매일DB

◇입법안 13건 중 통과는 고작 1건

지진을 비롯한 국가적인 대형 재난을 지원·수습하기 위해서는 국회 입법을 통한 법률적 근거 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과제인 예산확보를 위해서는 관련 법률을 제·개정하는 작업이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

포항지진의 경우 지난해 11월 20일 이후 9건의 법령을 13차례에 걸쳐 제·개정하자는 제안이 발의됐으나 현재까지 공포가 완료된 법안은 지역구 의원인 자유한국당 김정재(포항 북) 의원 등 10명이 발의한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일부 개정안 1건이 전부다.

나머지 12건 중 11건은 아직도 각 상임위 법안심사소위에서 계류 중이다. 지난 2월 1일 유일하게 상임위에 상정된 ‘긴급복지지원법’일부 개정안도 6개월이 넘도록 법안통과를 위한 후속절차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피해주민들이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법안은 지난해 11월 20일 김정재 의원 등 13명이 발의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일부 개정안과 지난해 11월 27일 김정재 의원 등 30명이 발의한 ‘지진재해로 인한 재난복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제정안 등 2건이 꼽힌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일부 개정안은 자연재난 중 지진으로 인한 주택 전파와 관련된 복구 부담액을 최대 3억원으로 높이고 국비 부담률을 80%로 상향조정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현행법령은 지진에 의해 주택이 전파될 경우 최대 900만원을 복구비로 지원하도록 하되, 내진설계 반영 여부에 따라 국고, 융자 및 자기부담 등의 부담률을 달리 정하고 있다.

개정안은 “주택 전파는 주택 주요 구조부가 50% 이상 파손돼 개축하지 않고는 사용이 불가능해 막대한 복구비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데 900만원이라는 상한액은 현실을 반영치 못해 보완이 요구되고 있다”고 제안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지진재해로 인한 재난복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제정안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을 발의한 김정재 의원 등은 기존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이 지진이라는 특수한 재난에 대한 지원 및 복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기보다는 풍수해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지진으로 인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지역에 한정해 풍수해보험가입 지원, 국고보조 등 지원책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법안의 주요 내용으로는 현행 ‘자연재난 구호 및 복구 비용 부담기준 등에 관한 규정’이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주택의 파손 정도를 소파, 반파, 전파 3등급으로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2등급으로 구분해 지원토록 하고 있다.

지원규모는 50% 이상 파손돼 개축이 필요한 주택은 최대 3억원 한도로 국가가 80%를 부담하고, 파손정도가 50% 미만이지만 수리가 필요한 주택은 최대 1억원 한도로 국가가 전액 부담토록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 지난해 수능시험 전날인 15일 오후 2시29분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북구 환호동의 한 빌라건물 외벽이 지진의 충격으로 처참하게 파손됐다.  /경북매일DB
▲ 지난해 수능시험 전날인 15일 오후 2시29분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북구 환호동의 한 빌라건물 외벽이 지진의 충격으로 처참하게 파손됐다. /경북매일DB

피해주민들은 이 2건의 법안이 지진복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아직 위원회 심사조차 열리지 않고 있는 두 법안이 본회의 상정을 넘어 최종 공포까지 이르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한 두개가 아니다.

만약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소급 적용이 가능한 지에 관한 문제가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앞서 지난 5월 24일 행정안전부가 포항지진시 나타난 미비점을 보완한 ‘지진방재 개선대책’에서 자연재난 복구비용 산정기준을 기존보다 44% 인상했지만 정작 포항지진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은 사례를 비춰볼 때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지더라도 소급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포항시 관계자는 “지진이 발생한 지 9개월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피해지역 주민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며 “재난 발생 초기 정부와 정치권이 보인 관심의 10분의 1이라도 신경을 써준다면 피해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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