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욱시인·포항 흥해남산초 교사
▲ 김현욱시인·포항 흥해남산초 교사

‘마음에게 말 걸기’의 저자 대니얼 고틀립은 고교 시절부터 학습장애로 낙제를 거듭했다. 대학을 두 번 옮긴 끝에 템플 대학교에서 학습장애를 극복하고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촉망받는 젊은 정신과 전문의로 성공 가도를 걷던 서른세 살의 어느 날, 불의의 교통사고로 척추손상을 입어 전신마비가 되었다. 결혼 10주년을 맞아 아내에게 줄 결혼선물을 찾으러 가는 길에 당한 사고였다.

그 후 극심한 우울증과 이혼, 자녀들의 방황, 아내와 누나, 부모님의 죽음을 차례로 경험하면서 삶의 지혜와 통찰력,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된다. 둘째 딸이 낳은 유일한 손자 ‘샘’이 자폐증 판정을 받자 어린 손자에게 전해주고픈 이야기들을 32통의 편지에 담는다. 그 편지들은 ‘샘에게 보내는 편지’ 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끔찍한 비극을 당한 사람들이 느끼는 일련의 감정들, 충격, 슬픔, 분노, 공포는 한 사람의 마음을 폐허로 만든다. 대니얼 고틀립도 ‘거대한 물체가 차창을 덮치는’ 마지막 장면 이후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의 몸이 전신 마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순간에 일생을 휠체어에 앉아 보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이렇듯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예기치 못한 사고와 비극 앞에서 인간은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다만, 거기서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고 체념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한다면, 삶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다. 암울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힘겹게 빠져나온 대니얼 고틀립이 병원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관찰하기’였다. 사실 그가 휠체어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관찰하기는 삶을 가만히 바라보기와 같다. 사람 대부분은 그럴 기회가 없다. 내가 누군지, 왜 사는지 모른 채 허깨비처럼 휘적휘적 살아갈 뿐이다.

대니얼 고틀립은 불행한 사고로 한순간에 휠체어 신세가 됐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얻은 셈이다. 누구에게나 불행한 사고는 일어날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80%가 후천적으로 일어난 사고 때문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사고’에 대처하는 자세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고 이후의 삶은 크게 달라진다. 덫이 될지 닻이 될지는 자신의 마음 먹기에 달렸다.

말리는 대니얼 고틀립의 딸 알리가 아끼는 다리가 세 개밖에 없는 개다. 말리의 다리는 네 개가 아니라 세 개다. ‘관찰’에 따르면, 말리는 잃어버린 다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산책할 때 말리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측은한 눈빛이 대부분이다. 다리를 잃는 것과 목이 부러지는 것은 삶의 질을 좌우하는 큰 사고다. 하지만, 동물과 사람은 여기서 완전히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대니얼 고틀리는 알아냈다. 인간에게는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다. 내 삶이 반드시 이러이러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에고가 존재한다. 다리를 잃거나 목이 부러지거나 암에 걸리거나 부도가 나 빈털터리가 되면 ‘자의식’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열등감과 절망으로 에고가 불타오른다.

말리와 같은 개는 삶을 온전히 끌어안고 산다는 것을 그는 목격했다. 조건 없이 사랑하고, 부당한 처우에도 불평하지 않는다. 삶과 사랑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온몸으로 껴안고 산다. 자존감이나 정체성이란 말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알아챘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나라는 생각과 감정은 정말 내 것일까? 호흡명상을 할 때 숨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만을 의식하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온갖 생각과 감정은 쉴 틈 없이 피어오른다. 부지불식간에 생각에 끌려갔다가 감정에 내동댕이쳐지는 나를 본다.

대니얼 고틀립이 만났던 지혜로운 노부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처럼 ‘나’라는 글자가 더 작고 흐릿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는다면 삶이 훨씬 충만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