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논설위원
▲ 안재휘논설위원

젊은 날 군문에서 장교교육을 막 받기 시작했을 때 교관으로부터 들은 멋진 말이 있다. “군(軍)이란 상명하복(上命下服)이라는 지극히 비이성적인 전통으로 ‘국방’이라는 위대한 이성을 구축하는 존재”라는 정의다. 상명에 무조건 복종하는 습성을 붙이는 훈련을 받으면서 적잖이 혼란스러웠던 그 때, 그 교관의 말은 소중한 깨달음으로 각인됐다. 그 깨달음은 고달픈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종요로운 정신적 자양분으로 작용했었다.

최근 창군 이래 대한민국 국군에 최악의 하극상(下剋上) 혼란이 펼쳐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지난해 3월 탄핵 정국 때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계엄검토 문건과 관련해 번지고 있는 논란이 엉뚱한 곳으로 비약되면서 군 전체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폭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무사 계엄문건’ 사태의 본질은 그것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개념계획’ 시나리오였느냐, 아니면 ’실행계획’까지 준비됐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건을 놓고 청와대와 국방부 장관이 이견을 보인 데 이어, 이번엔 장관과 부하가 국회에서 대놓고 폭로전을 벌이는 사상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국민 앞에서 서로 자신이 옳다고 싸우는 군 최고 수뇌부의 추태는 경악을 부른다. 머릿속에 ‘당나라군대’, ‘개판’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기무사 문건을 둘러싸고 나뉘어지는 정치적 관점은 천양지차다. 이 문건을 일종의 ‘개념계획’에 불과했다고 보는 쪽은 대뜸, 논란을 확대재생산하는 청와대의 속내를 의심한다. 이미 지난 3월16일에 인지한 문건을 묵혀두었다가 ‘탄핵정국 친위쿠데타’로 포장해서 국면전환용으로 써먹고 있다는 주장이다. 북핵문제와 경제문제 등이 꼬이면서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해석인 것이다.

반면 청와대와 여당은 촛불시위 국면에서 엄청난 ‘친위쿠데타’가 음모되었고, 그 실행계획을 기무사가 작성했다는 식으로 확대선전하려고 한다. 문건내용을 거두절미해 자극적인 내용만을 펼쳐놓고 국민들의 분노를 부추긴다. 대통령이 거듭 공개적으로 심각성을 부각시킨 일이 정략적 의도를 의심 받는 의혹의 빌미가 되고 있다.

청와대도 인정하듯이 문건은 ‘탄핵이 기각됐을 경우의 상황을 가정해서’ 만들어진 내용이다. 그런데 마치 평화적인 광화문 촛불시위대를 군대가 마구잡이로 쓸어버리려고 했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전제를 인위적으로 생략한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다. 기무사 문건이 비밀문서로 분류되지도 않고 평문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군대의 모든 작전계획은 최소한 2급 비밀로 분류된다. 그런데 공식라인을 통해서 국방부장관에게 보고된 문건을 놓고 은밀한 ‘쿠데타 실행계획’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기무사 문건을 놓고 천인공노할 반란행위로 침소봉대하는 쪽이나, 국회마저도 무력화시키려는 위험한 탁상공론이 들어간 군 권력기관의 스케치 내용을 애써 무시하는 쪽 모두 어설프긴 마찬가지다. 누군가 명령을 내렸을 것이고, 상명에 복종해야할 요원들이 과잉충성심까지 발동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실체를 파헤치는 일은 냉정한 이성과 판단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쿠데타의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성취한 나라의 군 정보기관이 하는 수상한 짓을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불행한 역사의 되풀이를 막을 촘촘한 제도적 혁신이 꼭 필요하다.

사태의 본질과는 다르게, 국회에 출석한 장군들이 서로 상대방을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삿대질을 해대는 풍경은 참담하기 짝이 없다. 아무리 보아도 ‘진실’을 밝히려는 순정보다는 ‘각자도생’의 천박한 본능만 처연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어느새 세월이 바뀌어 상명하불복(上命下不服)이 국방력의 원천(?)이 되었나, 한탄이 절로 나온다. 북한의 평화공세 속에 안 그래도 흔들리는 국가안보가 더욱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걱정이 새록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