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순희수필가
▲ 김순희수필가

이상한 처방전을 받았다. 발목이 아파 걷지도 못하겠다는 나에게 한의사는 지금 생각나는 사람의 이름을 발로 써보라고 했다. 통증을 참으며 한 글자 한 글자 써 보이자, 침도 맞지 못할 정도로 기가 약하니 입에 맞는 음식 먹고 틈 날 때마다 발목에 힘을 주어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하루에 스무 번씩 쓰라는 숙제를 내 줬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한의원을 나오며 소개했던 친구에게 약도 안 지어주니 돌팔이 같다며 다녀온 이야기를 떠벌리자, 남편 이름 열심히 쓰면서 몸을 보하라며 웃었다. 남편 가족끼리 손도 잡는 거 아니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무슨 소리하냐고 눈을 흘겼다. 내가 쓴 세 글자는 남편도 아들 이름도 아닌 다른 남자라고 하니 친구의 눈에 호기심이 가득해졌다. 바람난 여자 보듯 말이다. 하루에 몇 번씩 되뇌려면 좋아하는 걸 넘어선 ‘사랑’이어야 한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뛰는 사람,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해지는 사람이라야 ‘애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겐 그런 남자가 있다. 그이의 이름을 오늘만도 수십 번 발을 들어 허공에 긁적거렸다. 즐거운 숙제다.

나는 몰래 이 남자를 지켜본다. 이 사람은 훔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도루를 하기 위해 1루 베이스에서 두세 걸음 떨어져 마운드의 투수를 노려보는 등번호 39번의 눈빛은 매력적이다. 투구 폼을 먼저 읽고 뛸 타이밍을 노리느라 가끔 눈에서 불꽃이 떨어질 듯하다. 2루 베이스를 점령하기 위한 그의 발놀림은 마치 투우사에게 달려가기 전 성난 황소의 그것이다. 견제구가 날아 올 때마다 슬라이딩을 한다. 1회 말 공격이 끝날 때쯤이면 그의 유니폼은 흙투성이가 된다.

이 선수가 가장 빛날 때는 수비할 때이다. 외야수 중에서도 가장 수비 범위가 넓은 중견수가 그의 포지션이다. 딱! 배트에 정확히 공이 맞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달리기 시작해서 있는 힘껏 몸을 날려 글러브와 함께 잔디위로 미끄러진다. 슈퍼세이브다. 그만이 할 수 있는 수비라고 캐스터가 목소리를 높인다. 몸을 사리지 않는 탓에 부상이 잦다. 몇 해 전에 동료선수와 부딪혀 턱이 부러져 수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허슬 플레이는 멈추지 않는다.

늘 달리는 이종욱 선수라 팬클럽 이름도 ‘런투유’이다. 팬클럽에 가입해서 응원을 하고, 길가다 39번 거리라는 표지판을 발견해도 인증샷을 찍는다.

서울에서 팬미팅이 열렸다. 몇 천 명 회원 모두가 참석할 수는 없고 등급이 높아야만 했다. 운 좋게 나도 스태프에게서 초대를 받았다. 화면으로만 보던 선수를 같은 공간에서 본다는 기쁨에 시댁 김장하는 날임에도 교육 간다는 핑계를 대고 팬미팅에 갔다. 만나면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막상 눈앞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떨려서인지 앞에 놓인 음식도 넘어가지 않고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39번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휴대폰으로 투샷을 찍으리라 마음먹었지만 집에 돌아올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진 한 장도 못 찍고 나왔다는 걸 알았다.

올해는 특히 이 선수에게 중요한 해이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더 이상 경기장에서 그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자신의 등번호와 같은 나이인 서른아홉이라는 숫자와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한 경기 한 경기가 소중한 시간이다. 어제 경기, 3점 뒤진 채 9회 말 만루 찬스에 그가 타석에 들어섰다. 전 타석까지 병살에 땅볼에 역전찬스를 날려버린 그였기에 투수는 앞 타자를 포볼로 거르고 이종욱과 승부를 내기로 한 것이다. 보는 사람도 떨리는 순간이었다. 딱! 맞는 순간 만루 홈런이었다. 그가 한 손을 들고 경기장을 돌 때 나도 같이 뛰어 올랐다. 아프던 발목에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열심히 쓴 덕분이다.

사랑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