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덕대학교 대학심인당 덕일 정사
"산목숨을 죽여서는 안 된다/또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된다/그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서도 안 된다/난폭한 것을 두려워하는 모든 생물에 대하여 폭력을 거두어라."('숫타니파아타’ 소품 '담미카')

이제 봄기운이 완연하다. 봄의 전령은 뭐니뭐니해도 새 생명의 탄생이다. 생명의 탄생은 신비 그 자체이며, 불교에서는 생명 그 자체를 부처로 여긴다(一切衆生悉有佛性).

불교는 자비행의 종교이다. 자비행 가운데 으뜸은 생명을 보호하고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생명을 죽이는 살생이야말로 불교에서는 부처를 죽이는 것으로 간주하여 가장 큰 죄로 여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죽이는 사람은 무자비한 사람이요, 불교인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장마철에는 생명의 번식력이 왕성하기 때문에 잦은 보행은 뭇 생명을 무심코 해칠 수가 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장마철에 안거(安居)를 택하여 살생을 최소화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 정신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미물들이 죽을까봐 뜨거운 물을 하수구에 버리지 아니했다. 들에 나가 밥을 먹을 때도 주위의 생명들을 위하여 ‘고수레’를 외치며 나누어 먹었다. 감을 따더라도 ‘까치 밥’이라 해서 날 짐승의 먹이를 남겨두었다. 심지어 누에를 치는 사람들은 인간을 위해 죽어간 누에의 영혼을 달래는 ‘천도재’를 지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자비는 생명의 크고 작음, 유생물 무생물을 가리지 않는 대자비심으로 모든 생명을 고귀한 것으로 여기며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명존중의 정신과 자비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대부분의 계율에 있어서 불살생계를 첫 번째로 두고 있다.

하지만, 불교의 계는 명령이 아닌 습관성이다.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계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습관을 길러 자비정신으로 살아가라는 뜻이다. 이행 가능한 것은 명령이 될 수 있지만, 불교의 계는 도저히 이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명령이 될 수 없다. 노력 여하에 따라 사람은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만, 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것을 지킨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걸어다니면서 수많은 미물을 밟아 죽이고, 숨을 쉬면서 수많은 미생물을 코로 들이켜 죽이고 있다. 또한 파리·모기·바퀴벌레, 그리고 농부가 뿌리는 농약·살충제 등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죽이는가?

‘불살생계’는 명령이 아닌 것이다. ‘죽이지 말라’고 하는 금지가 아닌 것이다.

불교의 계는 범어 ‘시라(尸羅,ila)’의 역어이다. ‘시라’는 ‘습관들이기’라는 의미이다. 식사 후에 이를 닦는 습관이 들면, 이를 닦지 않을 경우 기분이 좋지 않듯이, 생명을 죽이지 않는 습관, 생명을 살리는 습관을 체질화하는 것이 ‘불살생계’의 의미이다.

자신의 생명을 함부로 끊는 사람, 남의 생명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의 기사가 연일 보도되고 있는 지금현실에서 생명존중의 자비정신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줄 알게 된다. 자기를 보호하는 자기 계율에 철저한 사람은 남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남의 육신에 대한 배려는 자기의 몸도 다치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살생은 단명의 과보를 받고, 방생은 장수의 보를 얻는다. 자기 목숨 중하거든 남의 목숨 살생 말라.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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