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서예가
▲ 강희룡서예가

당조(唐朝)는 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 가장 성세를 구가했던 나라다. 그중 성당의 핵심 군주는 당태종(이세민·598~649)이다. 이른바 ‘정관의 치’는 태종 때의 연호(정관·627~649)를 딴 치세기를 일컫는다. 형제를 죽이는 참극(현무문의 변·626년 7월 2일)을 바탕으로 어좌에 올랐지만 태종의 정치력은 중국 역사에서 드물게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다. 한 고조 유방의 호탕함과 용인술과 위(魏) 무제 조조의 지모와 용병술을 갖췄다고 할 정도였다. 한창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하거나 사치하지 않고 스스로 근검절약하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애써 황족과 대신들이 이를 본받게 했다. 당시 유럽의 문화는 당의 문화에 비해 보잘 것 없었다. 그런 그에게도 3개의 거울이 있었다. 우선 손거울로 자신의 옷매무새 등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역사를 거울로 삼아 세상사의 흥망함의 이치를 잊지 않았으며, 사람을 거울로 해 득실을 밝히려 애썼다. 그 ‘사람 거울’ 가운데 한명이었던 명재상 위징이 죽자 그는 “내가 평생에 모범으로 삼아왔던 거울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한다. 위징은 원래 태종이 그 손으로 죽인 형 이건성의 사람이었다. 현무문의 변을 거친 뒤 그를 받아들여 세상을 다스리는데 함께 했다. 여러 현명한 신하 가운데 위징은 살아생전 태종에게 신랄하고 통렬한 충언과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 태종의 빛나는 치세는 타고난 절세의 기량과 수권 과정에서 흘린 형제의 피에 대한 참회의 기억, 2대만에 멸망하고 만 직전 왕조인 수나라 등이 반면교사였다. 그에 더해 위징과 같은 여러 현신들의 충언, 직언이 뒷받침되어 가능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일관된 평가다.

뛰어난 군주 현신들로 성세를 구가한 나라와 달리 아둔한 군주, 요사한 간신들이 설쳐 나라를 요절낸 역사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진 왕조다. 그 애비 시황제가 세운 공전절후의 업적이 무색하게 못된 자식 호해(2세 황제)는 단명에 그친 왕조를 가장 비참한 상태로 끝장내고 말았다. 호해의 무능, 아둔, 혼암은 희대의 간신 조고의 간언, 요언과 쌍벽을 이루며 망국에 이르게 한 절대 요인이었다. 우리의 예는 조선의 여러 임금들 가운데 선조(1552~1608)가 떠오른다. 왕조 말의 고종과 함께 무능한 군주의 표상으로 회자된다. 서자로 방계출신으로 대통을 이었다는 선조의 자기 결함적 열패감에도 당대에는 조선 성리학의 사표(師表)라 할 퇴계와 율곡, 백인걸, 유성룡, 이순신, 권율 등 현신과 용장들이 즐비했다. 그러나 국토가 유린당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극심한 참화를 겪게 한 7년간의 임진왜란에 대한 징후를 알아보지 못했다. 전란 중이나 전란 뒤 난국 수습에 보인 무능 등은 대부분 충언과 요언을 구분할 능력이 없었던 데서 비롯된다. 현대사에서도 이승만 전 대통령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일제 강점기 해외 독립운동에 의심의 눈길을 받는 그는 입지강화와 권력 유지를 위해 친일매판자본의 부활을 부추기거나 용인해주고 좌우 이념대립 및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는 데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 남하를 두려워 해 한강철교를 부수고 서울 시민들을 버려 둔 채 부산 등으로 피난을 갔던 일은 400여 년 전 선조의 몽진과 유사하다. 현재 구속기소된 두 전직 대통령과 그 주변에서 불법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유지에 협력, 조력·부역한 이들의 경우 새삼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모두 한 국가의 리더가 역신들의 간언, 요언에 놀아나 몰락의 한 가운데로 빠져들어 국가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은 사례들이다. 이러한 사례들이 역사는 돌고 도는 거울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고금을 관통하는 반면교사(反面敎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