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수철 서양화가

오래전 모기업의 사보에 기고한 글이 생각난다.

<어느날 글 쓰는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어릴 적 꿈을 가장 오래 간직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어릴 때의 꿈! 지금 우리는 그 꿈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꿈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호주머니 속에? 채워진 서랍 속에? 오래 전에 즐겨 읽었던 낡은 책갈피 속에? 아니면 당신의 가슴속 깊숙이 어딘가에 묻어두었는가? 그렇게라도 있다면, 있어서 어릴 때 아껴먹던 초콜릿처럼 그 꿈을 조금씩 먹을 수만 있다면 그래도 다행한 일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유년의 꿈을 잊었다. 시류처럼 흘러가는 저 강물에 던져버렸다. 정체불명의 아메리칸 스타일을 얻은 댓가로 저 높은 야망의 산 위에서 허공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그러고는 경제 동물적 부(富)를 찾아 허덕인다. 우리는 나를 버리고 내 것을 버렸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빨라지고, 분명해야 하며 내 것이 우선이어야 하는 이 각박한 시대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뒤엉켜 휘돌며 아우성치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날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 내용을 보고는 기가 막혔다. ‘김치, 깍두기, 된장, 고추장, 밑반찬 공장제품 인기, 전통음식을 만들지 못하는 주부들이 날로 늘면서 이런 식품들이 인기를 모으며 이런 제품의 공장들이 국내에 100여 개의 이르고 있으며…’ 그래, 우리는 나를 버리고 내 것을 버리고 전통을 버렸다. 그런 전통을 이어가며 새롭게 맛을 내는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인내하며 나보다 너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이웃과 함께 하는 정이 있었고, 어려웠지만 웃을 줄 알았던 신라인의 미소를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풍요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치 흡혈귀와도 같은 개인주의적 이기가 우리의 가슴을 모두 도려내어 남에게 내어줄 것 없는 빈 가슴만 남았다.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포항의 구 역사(驛舍)는 포항인들의 오랜 추억과 정서가 서려 있는 기억의 창고이다. 정치, 사회지도자들은 항상 “눈 앞의 이익보다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일을 해야 한다.” 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것들이 훼손되어 왔던가? 돌이킬 수도 없게. 포항의 구 역사가 이 지역의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 되었더라면, 그 역사는 우리 기억 속의 삶에 계속 살아서 포항인들에게 향수와 행복을 제공하는 샘물이 되고, 소중한 문화 인자로 자리하여 이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관광자원이 됐을 것이다. 그 옛날, 송도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아름드리 숲길도 그렇다. 오늘날까지 그 무성한 숲길이 남아있다면, 초록의 그늘을 지나 송도로 향하는 상상을 하면 가슴이 설렌다.

지난날 우리는 녹슬지 않고 깨지지 않는 스텐그릇에 혹하여 숱한 도자기 그릇을 개 밥그릇으로 내던지기도 했다. 이제는 우리가 지켜야할 소중한 그 무엇을 물리적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정서적, 심리적으로 심도 있게 해석하며 우리의 기억 속에,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자. 궁극적으로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힘으로 살아갈 때가 더욱 많다. 사진작가인 후배에게 “사진은 기록이 아니라 기억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내가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그 무엇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랫동안 간직하는 어릴 때의 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