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세상 모든 것에는 색깔이 있다. 색깔은 가시광선이 사물과 작용해 만들어내는 오묘한 현상이다. 우리는 빛과 색을 동일시(同一視)하지만 부가혼합과 감산혼합이 말해주는 것처럼 색과 빛은 다르다. 빨강 노랑 파랑의 세 가지를 합하면 검정색에 접근한다. 색은 더할수록 어두워지기 때문에 감산혼합이라 한다. 이와 달리 빛의 세 가지 근원인 빨강 녹색 파랑을 합하면 흰색에 접근하며, 이것을 일컬어 부가혼합이라 부른다.

인간은 색을 감각중심에 두고 대상을 감촉하며 사유한다. 십인십색이나 오방색 내지 색맹 같은 말은 전통적인 표현이되, 색깔론 같은 악의적인 조어(造語)는 수구 적폐세력의 전유물이다. 언젠가 적폐세력의 본산이 붉은 색을 자당(自黨)의 색깔로 결정했을 때 뜨악함을 넘어서는 공포감을 느낀 적도 있다. 저토록 색의 본질에 무심하고 무식한 자들이 모여 색깔론을 내세운 것은 권력욕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 가능할까?!

길을 걷다가 더러 시간의 색깔을 본다. 어린아이의 초록 초록한 시간과 청춘남녀의 새파란 색깔과 늙은이들의 죽어버린 무채색 시간을 본다. 너무도 퇴색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아파트 벽면 같은 노년의 우울한 색깔. 그래서일까. 늙다리들은 빨갛고 노랗고 파란 천연색 옷차림으로 중무장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노년의 색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반면에 청년은 검정색으로 치장하면 훨씬 돋보인다. 청춘의 강력함과 약동하는 힘을 강조하는 무채색의 본성이라니!

언젠가 서울에서 동대구 오는 길에 창밖의 사위가 어두워지는 색감의 무게로 켜켜이 덮여지는 현장과 만났다. 시속 300㎞의 고속열차가 선사하는 시간의 촘촘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내면에 자리한 예감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모르지만 시간의 색깔이 어둠으로 서서히 채색되는 광경은 지금도 선연하다. 중환자실에서 기약을 모른 채 누워계신 부친의 안위로 인해 동요했던 자식의 심사가 문제였을까, 돌이킨다.

하나둘씩 어둠이 아래로부터 차곡차곡 쌓여 눈높이까지 차오르는 광경은 실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아, 저것이 시간의 운동이며, 시간의 색깔이로구나. 그런 경이로운 장면과 대면한 이후로 나는 색깔과 시간을 명백하게 분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시간이 색깔이고, 색깔이 시간이라는 의식이 홀연 나를 찾아든 것이다. 내가 의식하고 다가서고 소중하게 아끼는 색깔이 있고, 꺼리고 던져버리고 경원(敬遠)하는 색깔도 있다.

프랑스 국기에 담긴 세 가지 색깔은 파랑, 하양, 빨강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형제애를 상징하는 세 가지 색깔을 국기에 담아낸 프랑스가 대표하는 근대세계의 표상은 얼마나 진지하고 아름다우며 인간적인가. 색깔에는 아주 많은 상징과 실제가 내재한다. 하늘의 푸름과 대지의 붉은색과 순백(純白)의 눈을 국기에 담은 러시아는 또 어떤가. 몽골의 국기에도 대지와 하늘의 조화와 공존이 담겨있다고 한다.

요즘 청춘들은 무슨 색깔을 좋아하고 어떤 색과 거리를 두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색깔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간다. 놀라운 일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특정한 목표의식과 꿈이 실종된 지 오래다. 그저 지금과 여기의 닫힌 공간과 오늘의 제한적인 시간이 그들 몫이다. 왜라는 문제에 무심하며 ‘먹방’과 게임과 유희에 탐닉한 채 색과 빛, 그리고 거기 담긴 무한성과 영원에 태무심(殆無心)하다.

시간을 의식하는 지구별 유일자로서 색의 본령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군상은 두려운 존재다. 시간에 담긴 색깔을 모르고, 알려고 하지 않는 대중의 그로테스크한 담대함이 장마철 눅눅함을 가중시킨다. 하지만 언젠가 생명의 종언이 찾아오는 날, 홀연히 알게 되리니, 시간과 색깔의 일원론적인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