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얼마 전에 인터넷에 흥미로운 기사가 올라왔다. 1975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의 지능지수가 그전에 태어난 사람들보다 낮다는 것이다. 노르웨이 라그나르프리쉬 경제연구소의 로게베르크 부소장에 따르면, 75~95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는 이전 40~75년에 태어난 세대보다 지능지수가 평균적으로 7 정도 낮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이 속한 동북아지역의 지능지수는 여타지역과 달리 지능지수가 하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도이칠란트와 이스라엘 사람의 머리가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탈무드로 영재교육을 시킨다고 부러워하며, 세계적인 석학과 철학자들을 배출한 게르만의 명성에 익숙해진 탓이다. 그런데 지능지수 통계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동북아 지역의 한국과 일본, 대만이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능지수가 인간능력의 모든 것을 대변(代辯)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일정정도 믿을만한 근거는 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평균적인 지능지수가 높다고 해서 걸출한 천재나 위대한 과학자가 양산되는 것은 아니다. 상위 1% 내지 0.5%가 담당하는 지적-정신적 능력과 책임성 같은 것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얘기다. 평균적인 지능지수에서 세계 최상위에 있는 한국이 자연과학과 예술, 인문학 영역에서 지금까지 도달한 수준은 그다지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 실용실안에 만족하고 안주해온 관성 때문에 우리는 세계최고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한국이 주도하는 학문영역은 전무(全無)하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공학, 의학 어느 하나의 분야에서도 우리가 만들어내고 인도하며 쥐락펴락하는 독자적인 영역은 없는 것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저 베끼고 조금 고쳐서 개량하는 것에 익숙해왔다. 오랜 세월 중국에서 수입한 제도와 학문에 의지했고, 그 후에는 일본과 미국의 것을 모방하고 답습하는 것이 천석고황으로 자리 잡았다.

요즘엔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학생들이 소설 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장편소설은커녕 단편소설 읽는 것도 손사래를 친다. 호흡이 긴 글에 대한 두려움과 짜증을 감추지 않는다. 영상매체에 익숙해진 세대여서 그런지 독서 삼매경(三昧境)의 청춘은 찾아보기 어렵다. 서책을 읽다가 모르는 어휘나 구문이 나오면 사전 찾아가며 온전한 뜻을 새겨야 할 터인데, 그냥 넘어가기 일쑤다. 그러니 책은 점점 더 멀어지고 이해능력은 급전직하(急轉直下)다!

조지 오웰의 장편소설 ‘1984’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인간이 마주하는 세 가지 시제(時制)에서 현재가 주도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빅브라더가 대중을 통치하는 수법은 현재에 기초하여 과거를 수정하고, 현재에 터를 잡아 미래를 기획한다는 얘기다. 모든 것이 지금과 여기에 달려있는 셈이다. 이런 삶의 양태가 요즘 청춘들의 생활양식이다.

어제와 그제는 이미 멀어진 지난날이고, 1년 혹은 10년 뒤의 삶을 설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여기는 젊은이들의 세태가 소설 읽기를 멀리하게 만들고 있다. 긴 호흡으로 작가의 사유와 인식, 정서와 역사의식을 추적하는 유쾌한 지적 여행을 거부하는 것이다. 지능지수 높은 우수한 머리는 내던져두고 동영상과 게임에 몰두한다. 역사에서 배우고, 미래에 기초하여 현재와 과거를 재단하려는 노력은 실종됐다.

우연히 마주친 지능지수 기사는 분단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청춘의 대오각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이 여름 ‘희랍인 조르바’같은 소설을 읽어봄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