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지난 2009년 일본에서 첫 정당 간 정권교체가 있었다. 중의원 480석 중 야당인 진보 민주당이 무려 308석을 휩쓸고, 여당인 보수 자민당은 119석에 그쳤다. 일본 역사상 이런 보수와 진보의 대역전은 없었다. 보수 자민당은 처절하게 무너졌다. 사상 처음으로 만년야당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고, 만년여당 자민당은 야당이 됐다. 그때 위기에 봉착한 자민당에게, 자민당 출신 전직 총리이자 이미 은퇴한 노정치인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는 이렇게 조언했다. “보수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개혁한다. 그렇게 힘을 기르고 원칙을 지키며 개혁해 나가면 반드시 국민이 알아주고, 기회가 다시 온다.”

나카소네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전후 정치를 주름잡은 인물로 28살에 정계에 입문해 무려 20선을 연달아 지낸 일본 보수의 아이콘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이때 내놓은 ‘보수의 유언’은 ‘보수’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충언이었다.

자유한국당이 6·13지방선거에서 대참패를 하고, 혁신비대위를 구성하느라 몸살을 앓고 있는 지금, ‘보수의 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 사이에 ‘보수의 유언’이 새롭게 회자되고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는 경험담을 털어놨다. 10년 전 일본의 상황은 지금의 우리나라 보수가 처한 현실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떻든, 일본의 자민당은 4년 후 2012년 선거에서 깜짝 놀랄 대역전을 이뤄냈다는 사실이다. 역사상 첫 정권교체의 주인공이었던 민주당은 4년 전 획득의석의 4분의 1도 안되는 57석을 얻는, 대참패를 했다. 반대로 자민당은 294석을 얻어 절대과반수를 확보했다. 보수 자민당이 4년만에 다시 부활한 것이다.

보수 자민당이 나카소네가 쓴 ‘보수의 유언’을 얼마나 잘 따랐는 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이 보수의 갈 길을 밝히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나카소네는 책에서, “선거에서 지는 것은 낮이 있으면 밤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필자도 동의한다. 다만 그런 낙관적 희망을 현실로 바꾸려면 지혜로운 준비가 필요하다는 조언에 방점을 찍고 싶을 뿐이다. 이 책에서 위기에 빠진 보수의 심금을 울리는 메시지는 ‘행동하는 정치가 비전이 있다’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당의 힘을 축적하고 능력을 키워야 할 때다.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책을 만들고, 당과 당원들이 그 내용을 충실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 그런 다음 국회 등에서 여당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야 한다. 처음에는 너무 나가지 말고 토론과 논쟁을 해가면서 야당으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해 가면 결국에는 자민당이 국회에서 변했다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폭넓게 전달할 수 있다. 당장은 매서운 북풍이 불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할 일을 하고 있으면 반드시 상대방이 허점을 보이는 순간이 온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격적인 정권 탈환 작전에 들어가면 된다.”

보수당의 정체성을 부인해서는 안된다는 경고는 의미심장했다. “보수당은 역사와 문화, 전통을 계승해가는 입장에 있다. 창당 정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이 자신감 없는 행동은 용납할 수가 없다.”새로운 출발을 위해 혁신비대위를 준비하는 보수 한국당에 들려줄 만한 조언은 ‘초심으로 돌아가라’편에 빼곡했다. “야당시대는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여당 시대에 몸에 밴 호사를 떨쳐버리고 신체를 연마하는 시기다. 내가 무엇을 위해 정치인이 됐는가를 생각하고, 국가 비전을 머릿속에 그려가면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처럼 “꽃이 피어나지 않는 겨울 땅에 생명의 씨를 뿌리고 토대를 단단하게 구축하라”고 설파한 나카소네의 조언이 아무리 좋아도 보수 한국당이 듣고, 따라 행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랴. 다시보는 ‘보수의 유언’이 보수의 행보에 보태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