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수철 서양화가

내가 처음 선생님을 뵌 것은 80년대 초반이었다. 선생님께서 성신여대 학장직을 마무리하실 즈음이었다. 그 무렵에 고향인 초곡리에 자주 오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시면 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찾으셨고, 포항일요화가회 전람회장에도 오셨다. 그 즈음 필자는 집안의 우여곡절로 낮에는 중앙상가에서 남성복 브랜드 코오롱 맨스타 대리점을 운영하였고, 밤에는 작업실에 가서 그림에 몰두하곤 하였다. 성신여대 퇴직 후 동아대 예술대학장으로 부임하셨고, 서울보다 훨씬 가까운 부산이라 고향을 찾기가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포항에 도착하시면 제일 먼저 맨스타에 오시곤 하였다.

선생님은 동양화가인 정대모 선생을 자주 불렀고, 그런 인연으로 포항일요화가회와 포항묵화회 전람회장도 찾으셨다. 필자의 야간학교 3학년 담임이셨던 손춘익 선생님을 소개 시켜드린 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주선으로 포항에서 몇 차례의 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성신여대 퇴직금으로 고향인 초곡리에 한옥을 지었는데, 공사가 마무리되어갈 즈음부터 선생님의 요청으로 정대모 선생과 함께 그 집의 구석구석 보완해야 할 곳을 손보는 일을 하면서 선생님의 기호와 성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께 그 집은 보통의 집이 아니라 캔버스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건물과 건물 사이, 혹은 다른 무엇과의 담장, 그 담장의 흐름, 높이 그리고 동선, 정원수의 모양과 높이조절 등이 마치 화면을 구성하듯 하였다. 특히 모란을 시야에 잘 들어오는 곳에 한껏 두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유달리 짧은 처마는 바람과의 싸움에 잘 견디게 조정하셨다. 그 모든 것이 구도였고 구성이었다. 선생님과 바다 스케치를 여러 번 갔었는데, 강구항에서는 스케치를 하기 위해 전망이 좋은 식당2층을 몇 시간 동안 빌리기도 하였다. 두어 시간 넘게 작업하시며 마무리 단계에 “산이 왜 푸르게 보이지?”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스케치작업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실재를 치밀하게 표현하시는데, 그날 산의 색은 녹색과 고동색이 섞인 어두운 색채였는데, 나중에 도록에 실린 그림에는 산이 푸르게 칠해져 있었다.

이렇듯 선생님의 작업은 자연의 실재 모습을 섬세하고도 완벽하게 그대로 스케치한 후 작업실에서 재구성하여 자연의 실재와 선생님의 내면의 의식이 함께 호흡하며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 한 번 스케치를 시작하면 평균 2~3시간 동안을 엉덩이 한번 꼼짝도 안하시고 꼼꼼하고도 치밀하게 작업하셨다. 팔레트 위의 물감도 쥐똥만큼 짜놓고 쓰시고 작업 후 붓은 항상 실로 감아서 보관하신다. 안료의 낭비와 붓이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선생님의 작업과정은 철저하였다. 치밀하고도 끈질긴 과정을 거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셨던 것이다. 또 완성된 작품을 몇 번씩 다시 고쳐서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도 자주 있었다. 한번은 내 작업실에 오셔서 4호짜리 어둡고 둔탁한 색조의 ‘산과 구름’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시며 “박 선생! 그림은 이렇게 그려야 돼.”하고 격려해주셨다. 포항일요화가회 전람회 격려사에서도 “그림은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화화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하다.”며 후학들에게 그림 그리는 정신에 대해 가르치기도 하셨다.

일본 유학시절, 처음에는 그림공부를 하셨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법학을 공부하였고, 법대를 졸업한 후 다시 프랑스로 가서 그림을 하셨으니 법리주의적 치밀함과 프랑스의 예술적 화려함과 구성력이 선생님이 태어나 자라면서 보아왔던 ‘초곡리’ 촌락의 그 모든 들꽃과 산하와 농가의 삶속에 지워지지 않는 화석처럼 끊임없이 재현되었던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은 선생님의 가슴속에 늘 피어있는 들꽃이었으며 눈 감으면 보이는 고향의 그것들이 꿈처럼 살아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의 인생이 그러하듯.

지금 선생님은 고향 초곡리의 품에서 영원히 잠들어 계신다. 草軒 張斗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