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옥위덕대 교수
▲ 이정옥위덕대 교수

10년도 더 됐다. 학교 강의실에 처음 전자교탁이 들어왔다. 사용 방법이 서투르다 보니 수업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덜컥 문제가 생겼다. 이것저것 눌러도 안되고, 시간은 흐르고 학생들은 조용히 기다리다가 시간이 지나자 술렁이더니 대놓고 떠들기 시작했다. 난감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였다. 한 학생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아무말없이 전자교탁 위아래를 만지더니 이내 강의할 수 있는 모드로 뚝딱 돌려놓았다. 고맙다고 하면서 그제야 학생을 봤다. 유난히 눈이 크고 깡마른 학생이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괜찮습니다.”

별 말씀이라…. 이런 투의 말을 요즘 우리는 잘 안 쓰는데 생각하면서 한 번 더 자세히 보았더니 외국인 학생이었다. 베트남에서 온 응웬 휴비엔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휴비엔은 그 다음 시간에 베트남 학생들을 20명이나 더 많이 데리고 수강신청을 하게 했다. 강좌명이 ‘한국의 민속문화’였는데, 베트남 학생들이 들어도 흥미로울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학생들을 설득한 것 같았다. 나는 한국 학생만큼이나 많은 베트남 학생들을 배려하기로 했고, 학생들의 동의도 구했다. 강의용 교재도 쉬운 걸로 바꾸고, 팀활동도 한국학생과 골고루 할 수 있도록 신경썼다. 학기말에는 다같이 종강사진을 찍을 정도로 학생들 간의 유대도 매우 좋았던 수업이었다.

그 해 가을 어느 날 휴비엔이 연구실을 찾아왔다. 뭔가 상의하고 싶다고 했다. 며칠전 베트남 중부지역에 태풍피해가 크게 났다. 우리 유학생들 중의 한 학생도 그 지방 출신이다. 유학생들 20명이 1만원씩 내어 20만원의 성금을 모았다. 이걸 어떻게 하면 잘 전할 수 있을까, 이런 내용의 얘기를 서툴게 말했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냐고 물었더니 한국에서 배운 것이란다. 큰 재해가 나면 전국민이 성금모금을 하는 뉴스를 보고 감동받았다고도 했다. 아름다운 뜻을 키워주고 싶었다. 학교에 알려 학교 차원의 모금운동을 했다. 전교직원들이 십시일반 동참하고, 총학생회에서는 며칠 동안 모금행사를 벌여 성의를 보탰다. 처음 학생들의 모금액의 10배 이상의 돈이 모였다. 직원들의 아이디어로 옷가지랑 생필품도 10여 상자나 모았다. 성금과 구호물품을 서울의 베트남대사관까지 가서 전달했다. 당시 베트남대사관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해했다. 위덕대학교가 어디 있는 대학인지도 모르는 그들이었기에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그 일은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신문기사로 보도되기도 했다.

그 즈음이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지성이신 한완상 전 부총리께 당신의 유학생활에 대해 들었다. 60년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셨다. 당시 그 대학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유학온 학생들이 제법 많아 학교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축제를 마련했단다. 나라별로 부스를 차려주었다. 한국 유학생도 꽤나 있었기에 당연히 한국 부스도 있을 줄 알았더니 아예 명단에도 없었단다. 한국은 국제연합에 가입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답을 듣는 순간 가난한 약소국가 유학생의 설움을 뼈아프게 느꼈다고 말씀하셨다. 왜소하신 한 전 부총리님과 키 작고 마른 휴비엔이 겹쳐졌다.

최소한 휴비엔에게는 그런 설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원래 똑똑하였지만 성실하기도 이를데 없었다. 그 해 말 베트남대사관에서 주선하여 한국의 유명 건설회사에서 베트남 유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을 내리 3년을 받았다. 장학금 수령식 때마다 학생 대표 연설을 도맡았다. 국제교류재단에서 주는 생활장학금도 따냈고, 지역 로타리클럽의 장학금도 추천하여 받게 해 주었다. 보답을 확실히 하는 친구였다. 독학으로 한국어능력시험 6급을 땄다. 4학년 때는 한국학생과 당당히 겨루어 성적장학금까지 받는 기염을 토했다. 휴비엔의 존재감은 학교에서 더욱 확실해졌다.

멋진 제자 휴비엔은 지금 베트남에서 성공적인 직장인으로 매우 잘 살고 있다.

“휴비엔은 우리 대학 유학생들의 워너비이자, 롤모델이요,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