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다시 찾은
박인로의 예술혼

▲ 고향 영천에서 노년을 보내며 시조와 가사를 짓는 노계 박인로의 모습을 작가의 상상력 속에서 부활시켰다. /삽화 이찬욱

고만고만 야트막한 봉우리 사이에서 우뚝한 준봉(峻峯)과 같은 문학적 성취를 이뤘음에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안타까운 예술가가 한 명 있다.

경북 영천 출신의 그는 송강 정철(1536~1593)과는 ‘조선 가사문학(歌辭文學·시가의 한 장르로 고려 말에 생겨났고 조선 사대부가 확고한 문학양식으로 자리매김 시킴)의 쌍벽’으로, 여기에 한 사람을 더해 고산 윤선도(1587∼1671)가 합쳐지면 요즘 말로 ‘가사문학의 트로이카’로 거명되기도 한다.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와 백성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섰을 때는 칼을 든 무신(武臣)으로, 벼슬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인간과 자연, 더불어 세상의 이치와 순리까지를 문학 속에 담아낸 선비로 살았던 사람. 그는 누구일까?

답을 미리 알려주면 글 읽는 재미가 사라진다.

그러니 이름은 숨긴 채 먼저 그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글 싣는 순서
1. 노계 박인로의 생애와 예술세계
2. 노계문학관, 가사문학의 이정표 세우다

문·무 겸비한 시대의 예술가
임진왜란 의병 참전 ‘원종공신’
전쟁 중에도 ‘태평사’ 등 가사 지어
‘노계가’는 76세에 짓기도
영천시, 박인로 문학세계 복원 위해
춘향제·공연 등 다양한 노력

▲ 영천시가 추진중인 ‘노계문학공원’ 조감도.
▲ 영천시가 추진중인 ‘노계문학공원’ 조감도.

◆ 열세 살에 한시 쓴 천재… 서른아홉에 무과 급제

1561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서 박씨 성을 가진 한 아이가 태어난다. 집안은 가난했으나 그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총명한 소년으로 자랐다. 겨우 열세 살에 칠언절구 한시 ‘대승음(戴勝吟)’을 지어 동네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일찍 결혼해 아들을 낳았고, 책을 읽는 것은 물론 무예 수련에도 게으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30대 청년이었던 그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으로 참전한다. 적지 않은 무공을 세웠고 원종공신이 된다. 이어 경상좌도병사의 참모로도 종군한다.

화살이 날아드는 전쟁의 와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1598년 조선 수군(水軍)을 위로하는 가사 ‘태평사(太平詞)’를 짓기도 했다.

서른아홉이 되던 이듬해엔 무과에 급제해 수문장과 선전관 등을 지냈다. 마흔한 살에는 우리에게 ‘한음’이란 호로 친숙한 이덕형(1561∼1613)과 평생을 이어질 교류를 시작한다.

40대 중반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평화로 나아가자는 내용을 담은 절창 ‘선상탄(船上歎)’을 쓴 그는 쉰두 살에 ‘조라포 만호’ 벼슬을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표표히 돌아간다.

▲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노계문학관’.
▲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노계문학관’.

◆ 여든둘 세상을 뜨는 날까지 ‘예술을 향한 정열’ 멈추지 않아

영천으로 돌아와서는 옛 성인과 현인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뜻을 마음 깊숙이 새기는 일을 지속했다. 그가 꿈에서 주공(周公·중국 주나라 시대의 정치사상가)을 만나 받았다는 네 글자 ‘성·경·충·효(誠敬忠孝)’. 그는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이 글자들이 품은 의미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초야에 묻혀 지냈으나 그의 품성과 문학적 기량을 알아본 인근 벼슬아치들은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면 그를 초청해 시조 한 수를 청하는 낭만적인 풍경도 연출했다.

50대에는 ‘독락당’ ‘소유정가’ 등을 지었고, 회갑을 넘겨서도 예술적 정열을 그대로 간직하며 ‘입암이십구곡’과 ‘영남가’ 등을 지었다.

‘권주가’와 ‘상사가’는 나이 일흔을 넘겨 쓴 것들이고, 가사문학 연구자들이 “보기 드문 놀라운 성취”라고 이야기하는 ‘노계가(盧溪歌)’는 자그마치 일흔여섯에 지은 것이다.

16세기 중후반에 태어나 17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그는 당시로선 드물게 여든두 살까지 장수하기도 했다.

자, 이제 ‘그’의 이름을 밝힐 때가 됐다. 본관은 밀양,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 바로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박인로(朴仁老·1561~1642)다.

아직도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아래 시조를 읽어보자. 중·고교 시절을 지나온 독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법한 ‘조홍시가(早紅枾歌)’의 첫머리다.

한음 이덕형으로부터 조홍감(다른 감보다 일찍 익는 홍시)을 선물 받고는 그걸 가져다줘도 반길 부모가 돌아가시고 없음을 서러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은 즉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 박인로를 배향하는 서원 입구에 세워진 ‘노계시비’.
▲ 박인로를 배향하는 서원 입구에 세워진 ‘노계시비’.

◆ ‘노계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박인로의 인품과 학덕

박인로는 생전에 시조 67수와 가사 11편, 그리고 다수의 한시를 남겼다. 1831년 목판본으로 출간된 ‘노계집(盧溪集)’에 작품의 대부분이 실렸지만 안타깝게도 소실된 것 역시 적지 않았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지난해 ‘신역(新譯·새로 번역한) 노계집’의 출간을 주도한 (사)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 사업회는 발간사를 통해 박인로의 삶과 예술세계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고 있다.

“노계는 전쟁에서의 공과 학덕, 문학적 역량을 숨기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를 경모하는 사람은 당대에만 그치지 않았다. 작고한 지 60여 년이 지난 1707년 노계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던 유생들이 도천리에 도계사(道溪祠)를 세웠으며, 그 후 노계를 우러르는 향불을 꺼뜨리지 않았다.”

이 책은 박인로의 됨됨이에 대해서도 짧지만 명료하게 언급하고 있다. 아래와 같은 문장을 통해서다.

“노계의 인품은 그가 교유한 인물을 봐도 알 수 있다. 한음 이덕형과는 동갑으로 교분이 두터웠고,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지산 조호익 등 당대의 유학자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했고, 그들은 노계를 허여(許與·마음으로 허락하여 칭찬함)하였다.”

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는 “노계의 문학은 바로 노계가 발붙였던 곳의 문학이고, 현실의 문학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 박인로의 작품을 모아 간행된 ‘노계집’.
▲ 박인로의 작품을 모아 간행된 ‘노계집’.

◆ 영천시, 노계 박인로의 ‘예술혼 복원’에 힘 쏟다

노계의 고향 영천시는 현실에 기반해 안빈낙도(安貧樂道)와 충효사상을 빼어난 가사와 시조 속에 담아냈던 박인로의 드라마틱한 인생과 뜨거운 예술혼을 지역 주민은 물론 전국적으로 알리기 위해 그간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난해 봄에는 ‘2017 영천, 춤으로 물들이다’ 공연을 통해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였던 박인로의 문학세계와 예술혼을 창작무용으로 형상화해 무대에 올렸고, 노계의 작품 ‘태평사’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댄스 퍼포먼스도 펼쳤다. 한국 전통춤의 매력을 박인로의 문학예술과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려 한 시도였다.

이에 앞서 지난해 4월엔 영천 지역 유림 등이 참석해 ‘노계 박인로 선생 춘향제’를 봉행하기도 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봉진례, 전폐례, 초헌례를 진행하며 용맹한 무신이자 뛰어난 시인이었던 박인로를 추모했다.

이날 자리를 함께 한 영천 시민과 유림들은 박인로를 떠올리며 “임진왜란 때엔 위기에 빠진 국가를 위해 칼을 들었고, 영천으로 돌아와서는 먹 갈아 붓을 들어 수백 년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명문을 쓴 문무겸비(文武兼備)의 선비”라고 입을 모았다.

앞서 언급된 여러 사업들에 이어 노계 박인로와 관련된 가장 주목할 만한 기념사업이 현재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오는 26일 개관식을 열고 방문객을 맞을 예정인 ‘노계문학관’과 향후 영천시와 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 등이 힘을 모아 추진할 ‘노계문학공원 조성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지역에서 출생하고 성장해 큰 업적을 남긴 문화인물의 예술혼을 복원시키기 위해 진력하고 있는 영천의 행보를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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