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순간적인 간절함에 빠진 철새 정치인들이 떠난 네거리가 평온하다. 그런데 불법은 여전하다. 허리가 땅에 떨어지도록 인사하던 자들이 떠난 자리에는 영혼 없는 현수막들이 내걸렸다. 승자의 당선 인사와 패자의 감사 인사! 큰 글자만 보면 선거 결과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같이 성원에 감사하다는 상투적인 내용뿐이니까.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현수막의 주인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당선인”이라는 말이 ‘있고, 없고’이다.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언론들은 일제히 “여당 압승, 야당 참패”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또 어느 언론은 국민의 승리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기사로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다. 선거에 이겼다고 하는 당과 청와대는 축제 분위기이고, 언론의 말대로 참패한 당은 당의 존립까지 위협받을 정도의 초상집 분위기다.

선거를 두고 일명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선거가 꽃인 이유는 민주주의 이념의 핵심인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가장 잘 실현되어서이다. 그 선택이 잘만 되면 선거는 분명 꽃이다. 그것도 찬란한 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선거는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고, 결국에는 사회를 갈라놓는 독약이 된다. 특히 교육감 선거와 같은 깜깜이 선거에서는 더 그렇다.

동네 할머니께서 투표를 하고 오시면서 필자에게 말한다. “이 선생! 투표장에 갔는데, 교육감 뽑는 종이도 있더구먼. 나는 도대체 누가 누구인지 암만 봐도 모르겠더라. 이름을 한 번도 못 들어본 사람을 내가 어떻게 뽑아야 할지? 교육감이야 학교에 있는 사람들이 잘 알지, 손주들도 다 시집 장가간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교육에 대해서 뭐 아나. 그 중에 이름이 가장 그럴듯한 사람을 뽑았는데, 이 선생 이름이 있었으면 당장에라도 찍고 싶더라.”

과연 이런 선거를 우리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 누구를 위한 선거인지, 무엇을 위한 선거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이 나라에서 선거는 때가 되면 으레 치르는 일상적인 행사가 되어 버렸다.

필자는 목욕탕에서 데자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장면을 선거 다음날 보았다. 장면 속 등장인물은 같았다. 한 사람은 선거 후보자, 다른 사람은 유권자. 선거 전(前)에는 후보자가 특정 유권자에게 알몸으로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표를 구걸했다. 유권자는 아주 근엄한 자세로 열심히 하라는 말을 건방지게 던졌다. 그런데 선거 후(後), 장소와 인물은 같은데 역할이 반대로 바뀌었다. 당선인이 된 후보자는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였고, 열심히하라고 거만을 떨던 유권자는 후보자가 그랬던 것보다 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전했다. 지금 네거리도 이와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한 표를 부탁한다는 후보자들의 현수막 대신 당선을 축하하는 관변단체와 이익단체의 현수막이 네거리를 도배하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선거와 화장실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용변이 급할 때 만원(滿員)인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듯 선거 또한 당선 전과 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말이다.

낙선한 어느 후보자의 말을 화장실을 나온 것처럼 행동하는 당선인들에게 전한다. “이제야 알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선거 운동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시끄럽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요.” 물론 당선인의 명함을 달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에게서는 최소한 화장실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당선인들은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화장실 들어가기 전의 마음, 즉 선거 운동할 때의 그 간절한 마음을! 여러 당선인들의 당선 인사 현수막 중에서 유독 필자의 마음에 들어오는 현수막이 있다.

“부모님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책임지겠습니다.” 이 말이 꼭 지켜져 희망을 잃은 이 나라 교육에 경북교육이 새로운 희망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