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PC통신 동호회에서 창작 활동을 시작한 이래, '나비전쟁' '면세구역'에 이은 듀나(이영수)의 세 번째 단편집 '태평양 횡단 특급'(문학과 지성사 간)은 미래공상과학 사이버인터넷 단편소설이라는 다소 장황한 장르명을 부여할 수 있는 작품집이다. 듀나는 이영수 혹은 '듀나'라는 아이디 외엔,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아무 것도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작가로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다. 스스로를 '문화게릴라'로 부를 만큼 영화, 음악, 문학 등을 넘나드는 풍부한 지적 소양과 기발한 상상력을 자랑하는 듀나는 한국 SF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작가로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SF라면 그저 허황된 공상 소설 정도로만 여기던 한국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지며, 본격 문학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듀나의 이 작품집에는 표제작 태평양 횡단 특급 외에 히즈 올 댓, 대리 살인자, 첼로, 기생, 무궁동, 스퀘어 댄스,

허깨비 사냥, 꼭두각시들, 끈, 얼어붙은 삶, 미치광이 하늘 등 모두 12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는 주로 사이버 세계에서 작품 활동을 한 작가의 비인간적인 미래에 대한 우울한 풍경을 ‘태평양횡단특급’에서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다.

노동자 연주회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제5번’을 연주하는 사이보그 소녀 ‘트린’과 그에게 동성애적 집착을 보이는 ‘이모’의 이야기를 다룬 ‘첼로’, 만우절날 사이버 공간의 채팅과정에서 나눈 살인에 대한 잡담과 수다가 엽기살인극으로 현실화되는 ‘대리살인자’, 기계적 시스템이 인간을 완벽하게 지배하게 되자 인간이 기계에 기생(寄生)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기생(寄生)’, 죽은 딸을 생명 복제하는 어머니와 자살한 어머니를 다시 복제해내는 딸의 순환적인 삶과 죽음의 이야기인 ‘무궁동(無窮動)’, 다른 사람의 의식을 조종하는 직업을 가진 조종사인 ‘나’와 그런 ‘나’의 의식을 지배하는 또 다른 조종사, 그리고 그 조종사를 또 조종하는 조종사들의 자유의지와 삶을 다룬 ‘꼭두각시들’ 등 이 작품집에 실린 12편의 소설들은 우리의 현실적 삶이나 그 토대와 결코 조응하지 않는 것처럼 읽힌다.

본문 중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햇빛이 파이프를 타고 들어와 검은 얼굴을 간질이기 시작했을 때야, 나는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제 공장에서 긁어 모은 통조림들을 내가 손수 짠 배낭 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밤을 지낸 곳은 통조림 공장의 15층 b호에 위치한 포장재창고였다. 포장재 창고는 비교적 덜 민감한 곳이었다. 공장의 신경은 대부분 생산

라인과 제품 창고 안에 쏠려 있었다. 가끔 뜨내기들이 조리되지 않은 날고기와 채소를 훔치려고 그 예민한 곳들로 기어 들어간다. 열 명 중 세 명은 그 안에서 죽는다. 시체들은 모두 절단기로 잘게 썰린 다음 소시지 공장으로 실려간다. 사람 시체는 모두 소시지 공장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온 규칙이다. 그렇다고 소시지를 안 먹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그 규칙이 고마울 때도 있다. 배가 비교적 덜 고파서 지금 씹고 있는 고기들 중 일부가 사람 고기라는 사실을 느끼고 싶지 않을 때에는 소시지만 피하면 된다.”

매우 섬뜩한 공포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듀나의 소설에서는 낯설지 않게 재생된다.

우리는 가끔 진보된 과학에 의한 허황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유전자 조작이라든가 한창 빛을 발하는 클론, 점점 알 수 없는 기술의 혁신으로 발전하는 컴퓨터, 이제는 사용자가 자신의 컴퓨터를 모두 알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것과 맞물려서 돌아가는 사회상. 인간성의 상실, 자연의 파괴와 그에 따른 인위적 재생.

이런 단편적이고 복합적인 사실과 그에 따른 공상을 이 책에서는 현실로 접할 수 있다.

작가의 특유한 상상과 허무하다 할 만큼 떨어져있는 관점들에서 우리는 우리의 친구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멀지도 또한 가깝지도 않는 간격에서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미래는 현실이 되어가는 것일까….

<이정옥·위덕대 문화콘텐츠학부 교수>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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