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덕대 문화콘텐츠학부 이정옥 교수
현란한 영상매체의 시대다. 모든 상상력은 죽고 영상이 만들어낸 이미지만 난무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활자는 오래 전에 영상에 자리를 내 주고 뒷전으로 물러앉고 말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활자는 죽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도서출판 열림원의 시설(詩說)시리즈는 이런 세태를 보여줌과 동시에 극복하려 한다. 다년간 시설 연작 출판을 기획하고 있다. 그 네 번째 시리즈인 여성작가 조은의 '빈방들'이다.

시설(詩說)이란 무엇인가? 시설은 시처럼 압축적이면서도 산문처럼 구조적인 새로운 글쓰기다. 시처럼 압축된 간결함과 언어의 밀도, 거기에다 산문의 구조적 완결성이 결합된 것이다. 200자 원고지 250매 내외의 원고량은 방대한 장편소설에 비해 훨씬 읽기에 편하다. 일상적 현실의 무게를 직관과 상상력으로 포착하는 이 장르를 프랑스에서는 ‘레시 포에티크’(Recit Poetique)라 부른다.

이 새로운 글들은 시의 난해함이나 소설의 무게감에 질린 독자를 책의 매혹 속으로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 같다.

거기다 한 가지 덤이 있다. 아름다운 소설과 산뜻한 그림이 한데 어울려 투명한 시적 여백을 느끼게 하는 것.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상급 화가의 산뜻한 일러스트레이션은 더이상 글의 보조적인 수단이 아니다. 때론 그림이 글을 이끌고 서사를 견인하기도 한다. 글과 그림이 최대한 상승효과를 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작가와 화가는 서로 작품에 관해 대화해가면서 작업하기도 했다. 그림 작업의 비중이 컸던 만큼, 화가와 그림에 대한 짤막한 에세이 ‘이 화가의 빛깔’도 실려 있다. 그래서 시설 시리즈 한 권 한 권은, 소설가의 책이면서, 동시에 화가의 책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길고 지루한 것을 싫어하는 독자를 의식, 짧은 글쓰기로, 영상시대에 맞게 보는 즐거움도 곁들인 퓨전글쓰기인 셈이다. 그 중에서 문학만을 따로 떼어 본다면 시인이 쓴 소설, 혹은 시 같은 소설로 이해하면 된다.

작가 조은은 시집 ‘사랑의 위력으로’ ‘무덤을 맴도는 이유’와 산문집 ‘ 벼랑에 살다’ 등을 내놓은 바 있는 시인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존재의 이유’를 묻는 문학세계를 구축해왔다. 이번에 내놓은 ‘빈방들’은 출판사 측이 내세운 ‘시설’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시적인 감각과 언어가 돋보이는, 한편의 ‘시 같은’ 소설로 읽는 이에게 다가온다. 책의 삽화를 맡은 류준화씨의 그림도 주인공 여자아이의 내면세계를 잘 담아내고 있다.

‘빈방들’은 중편소설이다. 집안의 기둥이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파산과 외도, 고모와 오빠의 가출, 엄마의 죽음 등 도저히 회복할 길 없을 것처럼 무너져 내린 가정의 한 소녀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싹 틔워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열서너 살 된 주인공 여자아이는, 자신을 찾아온 강아지와 함께 빈 집을 지키고 산다. 아빠의 외도와 엄마의 죽음, 그 리고 오빠의 가출 등으로 가족들이 모두 떠난 빈 집에 홀로 남은 여자 아이는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히며 참혹한 현실에 시달린다. 과거는 물론 현실과도 타협 못하는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는 듯한 ‘삶의 통증’뿐이다.

어렵게 어렵게 과거와 화해하고, 남은 가족과의 재회를 약속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처럼 철저하게 삶에 유린당한 주인공이 겪어온 아픔 위에 놓인 것이기에 마땅히 설득력을 갖는다.

<이정옥·위덕대 문화콘텐츠학부 교수>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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