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호남 사림학파를 대표하는 미암 유희춘은 20여년의 귀양살이 끝에 선조 즉위 후 복직돼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에까지 오른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다.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정창권 풀어씀, 사계절 간)는 그가 1567년에서 1577년까지 11년간 거의 매일 한문으로 기록한 방대한 분량의 개인일기인 ‘미암일기’(보물260호)를 중심으로 16세기 양반가정의 일상생활을 사실대로 재현한 책이다.

책 제목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는 미암이 오랫동안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그의 아내인 송덕봉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따온 것이다.

‘미암일기’의 주요 등장인물은 미암의 부인으로, 시적 감각을 지닌 송덕봉이다. 책의 총 목차를 보면 16세기 조선 양반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관직생활, 살림살이, 나들이, 재산증식, 부부갈등, 노후생활 등 여섯편으로 나눠 저자의 해석과 상상력을 곁들여 현대식으로 풀어냈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지루하고 딱딱하다. 정치, 경제, 왕조사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생활사, 일상사에 대한 관심을 쉽게 풀어쓴, 역사 대중화라는 명제를 실천한 좋은 읽을거리이다. 일반 독자라면 가벼운 콩트처럼 읽어가면서 역사 지식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정치사를 넘어서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을 표방하는 생활사 연구의 중요한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당시 관리는 몇 시에 출근을 했는지, 용변을 본 후에는 어떻게 처리를 하였는지 등 시시콜콜한 생활 이야기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주고받는 대화와 그들이 맺는 사회관계 등 문화적 함의가 깊은 내용까지 당시의 생활상이 세밀하게 펼쳐진다.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만 소개한다.

“서울로 올라와 관직 생활을 하면서 홀로 지낸 지 서너 달. 그간 일절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아시오”라는 미암의 편지에 대하여 송덕봉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당연한 일인데, 어찌하여 겨우 몇 달 독숙했다고 고결한 체하며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시오. 당신은 아무래도 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병폐가 있는 듯하오.”

4백여 년 전인 1570년 6월 조선시대의 양반 내외간에 오간 편지의 일부다.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한다”면서 정결한 생활을 자랑하는 남편에게 괜히 생색내지 말라며 대거리하는 부인의 꾸중이 매섭다.

조선시대는 가부장적 질서가 유례없이 강했던 시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7세기 이전엔 꽤 열린 사회였다는 게 최근 연구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특히 앞의 편지에서 보듯 16세기를 전후한 조선 중기엔 여성의 발언권과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나눠줬고, 여성의 바깥출입도 비교적 자유로웠고 학문과 예술도 장려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이매창 등의 여성예술가가 대거 탄생할 수 있었다. 미암과 송덕봉의 관계가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당시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가부장제적 전통과 여필종부식의 남존여비 사상 등 TV 사극을 통해 우리에게 각인된 조선은 거의 전부가 임진왜란 뒤 조선 후기의 모습일 뿐이다.

정창권 선생은 일상사, 생활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국문학자이며, 여성문학자.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며 16세기의 관직생활, 양반들의 살림살이, 부녀자의 나들이, 양반층의 재산증식법, 부부갈등, 노후생활 등 양반 가정의 소소한 일상사까지 소설 문법을 차용해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이정옥·위덕대 국문과 교수>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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