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논설위원
▲ 안재휘논설위원

‘망매해갈(望梅解渴)’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AC196년 조조가 완성(宛城)의 군벌인 장수(張繡)를 공격하러 가다가 병사들이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자 갑자기 일어나 “저 산 너머에 매실나무숲이 있다”고 소리를 질러 병사들로 하여금 힘을 내게 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나폴레옹이 알프스산맥을 넘을 때 산 너머에 병사들을 기다리는 아리따운 처녀들과 풍족한 음식이 넘쳐난다는 말로 사기를 끌어올렸다는 비슷한 이야기도 있다.

살다보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황당한 일을 당할 때가 더러 있다. 한반도 평화 구축을 놓고 벌어지는 작금의 사변들이 꼭 그렇다. 전쟁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한다는데,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누군들 마다할 이유가 왜 있으랴. 그러나 지난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결과는 꺼림칙한 느낌을 짙게 남기고 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그 어떤 선지자들도 ‘정치’를 ‘거짓말’이라고 정의하지 않았음에도 현대정치는 경계 없는 식언(食言) 잔치다. 우리는 이미 여러 날을 북한 핵과 관련하여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라는 낯선 사자성어에 중독돼 살았다. 북미회담 당사자들은 세계인들을 향해 하루아침에 북한 비핵화의 기적을 이뤄낼 것처럼 장담해왔다. 하지만 트럼프-김정은 회담의 결과물에서 CVID는 결국 빠졌다. 북한 비핵화의 합의된 타임스케줄도 사라졌다. 도대체 무엇을 이뤘느냐는 회의적인 비판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북미회담 결과는 용두사미(龍頭蛇尾)를 넘어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로 나타난 느낌이다. 왠지 누군가에게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아주 거둘 수가 없는 형편인 것이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연초에 ‘경제 우선’으로 통치노선을 바꾼 이래 벌어진 평화무드 속에서 한미 대통령들의 정치적 과장에 휘둘려 우리 모두가 결국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 몰골이었다는 자괴감이 든다. 북한이 느닷없이 핵무기와 미사일, 화학무기 다 내주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들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란 사실상 추호도 있지 않았다.

한동안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평화잔치는 더 큰 숙제를 남긴 채 흘러갔다. 북한은 부지불식간에 ‘핵보유국’이 돼가고 있고, 대한민국은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더욱 더 바짝 붙잡지 않고는 안보를 장담할 수 없는 위태로운 나라로 전락하고 있는 중은 아닐까. ‘우리도 핵보유국 이 돼야 한다’는 담론마저 자취를 감춘 대한민국은 강대국의 체스판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희생양 꼴이다.

지방선거를 지나고 나니 또다시 국민들의 마음을 뒤흔든 무수한 ‘식언’들이 고약한 찌꺼기처럼 남아 있다. 선거에 나선 사람들이 표심을 현혹하기 위해 마구 내던져놓은 숱한 약속들 중에는 또 얼마나 많은 헛말들이 있을 것인가. 그 가짜약속들이 만들어낼 모순은 가차 없이 민생을 피폐하게 만들 것인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한미연합훈련 중단’이 또다시 이 나라 정치권의 최대 논쟁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한 트럼프의 약속을 정당화하기 위한 미국 고위급들의 중언부언도 길어지고 있다. 당사자들의 주장처럼, 북한의 진정성을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공이라면 당분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처지가 된 우리 국민들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한이 ICBM(대륙간 탄도탄) 개발을 그만둔다하니 동맹국 미국이 슬그머니 배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식언‘을 매개로 하여 권력을 쟁취하고, 우격다짐으로 힘을 키워가는 동안 백성들은 점점 더 고달파진다. 이 각박한 시대에 조조는 누구이고 나폴레옹은 또 누구인가. 그 무한대의 모순방정식 안에서 민초들의 삶이 날로 초라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