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퇴계집에 ‘정자중에게 보내는 편지(與鄭子中)’가 실려 있다. 내용은 ‘자신을 반성하여 실천에 힘쓰는 것으로써 날마다 연구하고 체험하는 공부를 한다면 앎과 실천이 함께 나아가고 말과 행동이 서로 합치할 것이다.’이다.

1564년에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은 성리학 이론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퇴계에게 충고를 담은 편지를 보낸다. 그 내용은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니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해 헛된 이름을 훔쳐 남을 속이려 합니다.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라고 적었다. 이 시기는 퇴계가 고봉 기대승(1527~1572)과 사단칠정논쟁(1558~1566)을 치열하게 벌이던 중이었었기에, 남명의 편지는 에둘러서 퇴계를 비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남명에게 변명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고 나서 못다한 이야기를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담는다. 그 내용이 위의 글인데 ‘실천을 바탕으로 논쟁을 한다면 이론과 실천 둘 다 발전할 수 있다’라는 뜻이다. 편지를 받은 제자는 자(字)가 자중(子中)인 정유일(1533~1576)이다. 오늘날에도 남명과 같은 취지의 비판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일부 정치인들은 현실에서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 선거 때만 되면 고원한 원칙과 이상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천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 원칙과 이상은 그저 허공에 뜬 국민을 속이는 말이 될 뿐이다. 그러나 퇴계의 말처럼 현실을 반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상을 실현한다면 이론과 실천은 함께 발전할 것이다. 한편으로 역사를 돌이켜보면 조선의 학문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것보다는 입으로 천리를 논했던 사단칠정논쟁을 통해 깊어진 면이 있다. 그것은 논쟁의 내용이나 결론 때문이라기보다는, 노성(老成)한 대학자와 신진학자들 사이의 격의없는 논쟁이 당대 지식인들에게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이 서로 말과 글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게 되었고 그것들이 쌓여서 조선의 학문이 되고 문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퇴계가 살던 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사람 사는 이치는 다를 게 없다. 일상의 삶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원칙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서로 토론하고 그 원칙과 이상을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노력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오늘날 자본주의 정치행태의 기초가 되며 가장 핵심적이며 민주주의의 꽃으로 일컫는 것이 바로 투표를 통해 대표자를 선출하는 선거이다.

우리의 선거방식은 후보자들에게 TV를 통한 무제한 정책토론 같은 형식의 선거운동이나 인터넷 방송의 활성화는 잘 보이지 않는다. 혹시 있더라도 선진국처럼 두 명을 선출하는데 무려 수십 일 동안 정책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약점을 헐뜯는 막말로 일관하다 끝을 맺는다. 무속인의 굿당을 방불케 하는 거리의 수많은 현수막을 보면 ‘현수막을 위한 선거’처럼 보인다.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골목을 울리는 선거 송, 얼굴 큰 긴 벽보, 명함 돌리기, 현란한 퍼포먼스 등 선진국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유권자와 소통이 아닌 선거공해로 전락하여 지금까지 진행형이다.

선거공약 또한 재탕 삼탕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같은 후보자들 입에서도 ‘선거 때마다 나오는 비슷한 공약들이 지방자치단체 미래를 무너뜨린다.’며 하소연하기도 한다. 이제 선거도 끝났다. 선택된 공직자들은 임기동안 약속한 공약을 퇴계의 가르침처럼 허언으로 끝내지 말고 실천으로 옮기는 일만 남았다. 임기동안 존재감 없이 세금만 축내다 차기에 또 출마하는 후보자 퇴출은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 개개인의 소중한 표만이 그들을 걸러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