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래<BR>수필가·시조시인
▲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정자나무 그늘에 앉아 유월의 산과 들을 바라봅니다. 모내기를 끝낸 들판은 착근을 한 벼들이 초록을 더해가고 녹음 우거진 숲에서는 뻐꾸기소리 들립니다. 올해는 봄비가 잦아서 초목이 더 무성하고 녹음이 짙습니다. 인공구조물을 제외하고는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초록입니다. 바야흐로 초록제복의 군대가 이 땅을 점령했습니다. 여름 한 철 의무복무를 하는 뭍 생명의 수호자들이지요.

녹색식물의 엽록소가 물과 공기와 햇빛을 합성해서 탄수화물을 만들어낸다는 걸 생물시간에 배웠지만, 정작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일인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교육이 대부분 그러하듯 생물선생님은 그 광합성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지구생태계를 유지하는 동력이라는 걸 강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엽록소의 광합성이라는 자연현상의 과학적 이해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는 삶의 의미와 중요성까지를 깨우치는 교육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지요.

인류가 자국의 안보를 위해서 온갖 첨단무기들을 개발하고 심지어는 핵무기까지 보유할지라도 저 녹색군대의 힘과 역할에 비한다면 한갓 부질없는 짓에 불과하지요. 생명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불모의 땅에서는 국가니 안보니 하는 개념조차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우리는 인류 역시도 생태계의 일부로 존망을 같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까먹을 때가 많지요. 울울창창한 녹색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 이 땅의 생명전선은 올해도 이상이 없습니다.

초여름의 햇볕은 따갑지만 잎이 무성한 정자나무 그늘은 쾌적하게 시원합니다. 인동꽃 향기를 실어오는 훈풍과 적막한 뻐꾸기소리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앉아 있노라면 세상에 아무것도 더 바랄 게 없는 무욕(無慾)의 상태가 됩니다. 지나간 것을 괴로워하고 다가올 일을 근심하는 마음을 잠시라도 내려놓으면 이 땅의 유월은 얼마든지 밝고 평화롭고 생기가 넘칩니다.

요즘은 치열하고 각박한 경쟁사회에서 심신이 지친 사람들이 ‘명상’을 하기 위해 사찰이나 수련원 등을 찾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명상을 통해 스트레스가 많은 현실로부터 몸과 마음을 떼어 놓음으로써 긴장을 풀고 밖으로 향했던 마음을 자신의 내부로 향하게 하여 마음의 정화와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지요. 무엇을 얻겠다는 목적이나 옳고 그름의 판단도 없이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명상의 첫 단계라고 하고요.

‘멍때리기 대회’라는 것도 있더군요. 현대인들의 지친 뇌를 쉬게 하자는 취지로 2014년부터 개최된 대회인데, 대회의 규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라 합니다. 그 대회의 첫 우승자는 의외로 아홉 살 소녀였지요. 자기 아이가 그렇게 ‘멍때리기’나 하고 있으면 대다수 부모는 왜 공부를 안 하고 멍청하게 있느냐고 꾸짖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멍하니 있는 것이 창의성이나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이는 뇌의 기능을 더 활성화 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하네요. 정작 부모들이 걱정해야 할 것은 ‘멍때리기’하는 아이가 아니라 잠시도 멍하니 있지를 못하고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는 아이들이라는 얘기입니다.

나는 따로 명상이라는 걸 해본 적도 없고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이나 선정(禪定)의 경지가 어떤지도 알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녹음 우거진 초여름 한나절 정자나무 그늘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다른 어떤 경지도 궁금하지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다// 초여름의 눈부신 태양과 녹음/ 인동꽃 향기 실어오는 훈풍의 한나절// 부귀와 권세와 명예/ 또 무슨 의미와 보람을 위해/ 촌음을 아껴야 할 황금 같은 시간에// 그 무엇으로도 바꾸려고/ 애쓰고 안달하지 않고, 멍하니/ 내가 그냥 그 시간 속에 앉아 있다” - 拙詩 ‘인동꽃 향기’